엄마가 된 나를 돌보며 살았던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시스터,
당신은 엄마가 되었지만
여전히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세요.
- 오소희 <엄마의 20년> 中
스물 일곱의 난 세계에 대한 ‘알 수 없음’으로 늘 들끓어 있었다. 나와 다른 타인을 수용하지 못하고 거대한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 나를 더욱 앓게 한 것은 내 자신을 잘 모르겠다는 그 잔혹한 진실이었다. 날카로운 언어로 스스로를 자학하고 자괴하기를 반복하다가 내가 들어선 세상은 ‘퇴사 후 인문학 여행’이었다. 이십대 내내 천착해 있던 요가도 날 구원하지 못했고 쉼 없이 달려온 전공 분야에서도 더 이상 날 찾을 수 없었다. 명함 하나로도 날 눈부시게 만들어 준 그 번듯한 회사에서 달랑 박스 하나 들고 퇴사한 날, 집에 들어와 화장실 바닥과 벽을 광나게 청소하면서 ‘자기이해’의 그 끝 모를 여정을 결심했다. 나를 알 때까지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숲을 산책하고 인문학을 배울 수 있는 여행지에 두 발로 걸어 나가고 영화를 보며 울고 음악을 듣다 잠들고 평소 뵙고 싶었던 두어 분을 직접 찾아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 문학을 개괄했다. 눈만 뜨면 모자를 눌러쓰고 카페로 나가 키보드가 부서져라 쳐댔다. 무의식 글쓰기와 치유 글쓰기의 진수를 그 때 경험했다. 난 더 이상 위로를 위해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되었고, 내 삶과 상처를 이해 받기 위해 떠돌 필요가 없었다.
인문학 여정의 기록을 논문 쓰듯 옮겨 놓은 내 블로그를 누군가 읽었다. 인문학 경영을 하고 싶어하는 한 청년창업가였다. 그와 인연이 되어 청년창업과 마을기업의 이사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식을 만지는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가 지금의 남편이다. 만난지 200일 정도 되는 무렵, 내 서른 살 가을의 어느 금요일 밤 우리는 결혼식장을 함께 걷고 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여기)
결혼을 하고도 아이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자기이해’의 그 여행이 더 깊어지고 짙어져서 나다움이 묵직하게 묻어난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했다. 성공의 척도가 되는 부와 명예와 권력이 한 톨도 없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라고 자부할 수 있는, 그 모든 신혼의 순간들이 꿈 같았다. 아니다. 현실이었다. 지극히 사랑스럽고 경이로운 현실.
그리고 어쩐지 이 아름다운 세계에 내 아이 한 명 즈음은 있어도 좋겠다 여겨졌다. 그리고 입덧과 정맥류, 아주 기나긴 수면이라는 매우 동물적인 증상들을 지나 두 다리를 벌리고 힘을 주어 아이를 낳았다.
산후조리원을 가는 건 나답지 않은 일이니 세상에 나온 지 이틀 된 핏덩이를 어설프게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유축기와 젖병과 기저귀와 거즈수건과 아이 베개 등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나답지 않은 물건들이었다. 초점책도 구비하라고 했다. 그 책은 내가 볼 책이 아니었다. 밤과 낮을 가리지 말며 아이에게 두 시간에 한 번씩 젖을 들이밀라 했다. 나다움을 공부할 때 이런 종류의 희생과 섬김은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 아이가 배고프다고 우는 캄캄한 새벽에 난, 내 인생이 오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를 쳤다.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꿈이다. 잠깐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와 함께 끔찍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사랑스러움과 끔찍함을 동시에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래, 글을 쓰자. 아이를 눕게 하고 광란의 육아 현실을 글로 치유하자. 출산 2주만에 가까스로 열게 된 노트북 앞에 앉은 난 키보드 위에서 갈 길을 잃은 내 손을 봤다. 아무 단어도, 아무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는 나를.
그렇다. 그제까지 내 삶은, 내 젊은 나날은, '아이 없는 세계' 다시 말해서 돌봄, 희생, 인내, 보호, 안내, 인도, 차세대, 모성, 양육, 육아, 학부모 이런 단어들과는 완전히 무관한 방식으로 흘러왔다. 그 날들에 내가 쌓아온 모든 지식, 언어, 문화, 관계, 신앙은 아이 없는 세계에서는 유용한 경험들이었지만 아이 하나라도 이 삶에 들어오게 되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리는 아주 연약한 경험이었던 셈이다.
내가 여태 배우고 써왔던 언어는, 쓴내나는 육아와 함께 피어 오르는 나의 모성을 대변하기에 아주 빈약하고 형편 없었다. 출산 이전 나의 언어는 늘 이성적이고 규칙적이어서 불안한 엄마의 마음, 아이와 눈 맞출 때 몽글몽글 생겨나는 동화 같은 감성, 고된 인내와 희생 끝에 얻는 행복 따위의 것들을 잘 담아내지 못했다. 육아일기도 그 무엇도 아닌 글을 써놓고 삭제하기를 수십 차례 하고서야 깔끔히 글쓰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예술이 정말 고팠다. 읽고 쓰고 말하고 들을 필요에서 완전히 해방된 그림의 세계, 그 세계에 무의식적으로 온전히 이끌린 듯 아이를 아기띠에 두고 그렇게 미술관과 갤러리를 유랑했다. 자기다움이라는 이슈에 그렇게 빠져들던 나였는데, 나만의 그림 취향을 따지고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그림들 앞에서 정신 나간 여자처럼 울고 웃다가 미술관 한 켠에서 기저귀를 갈았다.
엄마가 된 충격과 환희 속에서 어린 아이처럼 갈 길 몰라 하는 나의 영혼과 정신을 받아준 곳이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에서 엄마 된 나를 돌봤다. 그림 앞에서 날 돌보고 아이를 들어 안으면 내가 괜찮은 엄마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작은 희망이 샘솟았다. ‘아기를 데리고 어떻게 미술관을 가나요’ 라고 묻는 다른 여인들의 상황과 달리, 감사하게도 내 딸 아이는 미술관에서 잘 웃고 자고 쌌다.
이렇게 그림 앞에서 나와 아이, 두 인격을 돌보며 내 삶을 가꿔온 지 햇수로 다섯 해. 자기다움, 나다움에서 일부러 멀어지려 했던 시간들은 오히려, 나다운 엄마로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아티스트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 미술놀이 해줘서 고맙다고 편지 써주는 아이, 명화카드를 들고 스토리텔링하며 스스로 그림을 감상하는 아이, 밥 먹으며 오르세 미술관 책을 펼치는 아이, 미술관에서 나오며 길거리 댄스를 추는 아이, 이 사랑스러운 모습들은 모두 엄마인 내가 아니라, 날 길러준 예술들이 만들어 줬다.
먼 훗날, 젊은 엄마들 앞에서 나의 육아를 회고하게 된다면, 나의 육아는 예술에 빚졌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마음 읽어주는 선배 엄마 한 명 없었고 아이를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알려주는 다정한 언니 하나 없었지만 유모차에 아이를 눕히고 유모차를 밀며 미술관을 걸었던 시간이 내겐 위로이자 치유였고, 배움이자 성장이었다.
지금도 아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든 엄마들에게 그녀들만의 오티움이 있길. 누군가의 눈에 확연히 보이지 않더라도 그녀들 안에서 피어 오르는 그 생성의 시간들이 반드시 만들어지길 응원한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ecoming-us
2022.11.29
한 콘텐츠 커뮤니티의 연말 낭독회에서
읽힐 글을 미리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