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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Oct 14. 2022

다음에 올 땐 부산 여행 말고 부산 사람이 되자

여행을 기록하는 여섯 살 소녀


처음에 나는 아이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이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올 예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햇을 것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 오소희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매년 초여름에서 한여름 사이, 더워지기 시작해서 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그 사이, 아이와 부산을 찾았다. 아이가 세 살 때부터였으니까 벌써 4년째 부산을 그렇게 찾고 있다. 부산의 따뜻한 햇빛과 시원한 바닷바람, 폭풍우를 두루 경험하며 부산 여행자가 되어간다. 


스물 일곱 살 태어나 처음 부산에 갔을 때, 아마 그 즈음이었으리라.


이기대 수변공원을 한 시간 동안 땀 흘리며 걷다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거주지를 옮긴다면 그 도시는 부산이 될 것이고 혹 세컨드 하우스를 갖게 된다면 그 집 역시 부산이며.. 평생 서울 사람이라 경기도민, 제주도민, 강원도민, 충청 사람, 전라도 출신, 경상도 여자, 는 어색한 느낌이지만 내가 부산 사람으로 살아가는 건 어쩐지 상상하기 쉽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대학 때 상경했던 사람과 연애한 적이 있다. 너른 아량, 재치와 유머를 예찬하는 삶의 태도, 인생의 언덕과 고비를 마치 해운대 바다처럼 덮어버리겠다는 호탕함, 화가 나면 바다의 저끝 수평선처럼 마음의 선을 그려보겠다는 차분함, 바다가 집어삼킨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과 능력.. 내가 무언가에 쩔쩔 매고 있으면 '도시에서 자라 그렇구나.'며 바다를 보고 자란 자신의 매력적인 삶과 도시에서 자라 촌스러운 나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비교하곤 했다. 그를 보면 바다의 여러 얼굴을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이 괜찮은 남자는, 애석하게도 명품 쇼핑 중독이라는 이유로 한 해의 마지막날 나에게 차인다)






여행은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경험을 축적하고 새로운 생각들이 솟아나는 여정이라지만, 내게 여행은 아직, 그토록 대범하고 역동적이지 않다. 일상이 닿아있는 주거지에서 아주 멀지는 않은 곳, 어딘가에 소박하고 귀여운 짐들을 잠시 풀어 '일상과 여행 사이 어디 즈음에' 내 영혼을 내어놓는 정도. 일상을 온전히 떠나 해방된 느낌보다 일상과 아주 미세하게 연결되어 조금은 먼 산책을 나온 느낌으로 여행을 한다. 대형 짐들을 챙기고 유럽 여행을 다녀와 시차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을 3개월 겪은 경험이 아니더라도 장거리 여행은, 꼭 나답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가 걸은지 얼마되지 않은 15개월 때부터 기저귀 가방과 이유식을 챙기고 한두 달에 한 번은 훌쩍 떠나는 게 가능했던 이유다. (멀미하는 아이가 아니어서 감사, 여행 운전을 좋아하는 남편이어서 감사, 짐이 무척 가벼운 나여서 감사) 


아이와의 숱한 여행지 중 부산이 자꾸 떠오르는 건 바다 앞에 선 여섯 살 딸 아이의 모습이 경이롭게 느껴졌던 올해 6월의 여행 때문이다. 


"아인아, 이제 우리 서울 가러 비행기 타야 돼."

"엄마, 우리 다음에 올 땐 부산 여행 말고 부산 사람이 되자."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은 각자만의 예민함을 타고 나는데 우리 아이는 '물'과 '땅'에 예민하게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났다 하니 '물을 밟아라!', '땅을 밟아라!' 한 적 없다. 물놀이 장난감을 사본 일이 없고, 수영복은 패션쇼 의복일 뿐 기능을 다한 날이 없으며, 비 오는 날 물 웅덩이를 못 밟는다 하니 쌀가마니보다 무거워진 아이를 이고 다녔고, 땅에는 작은 벌레들이 보여 밟을 수 없다 하니 아이를 번쩍 들고 다녔다. (다행히 포장도로는 걸어 주었다. 이에 관한 수십 가지 에피소드를 엄마들 앞에서 이야기하면 모두 뒷목 잡고 환장하신다) 


장화 신기고 갯벌에 간 날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아이, 바닷가 모래에서 아빠에게 안아달라 하는 아이, 파도가 들어오는 모습만 봐도 손에 땀이 차는 아이를 보며 '아이가 클 때까지 바다는 글렀구나.' 했다. 부산에 가도 늘 먼 발치에서만 바다를 보고 돌아왔던 우리 가족, 올해 부산 여행에서도 역시 해운대를 멀리서 조망하고 이제 김해공항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공항으로 가던 길, 갑자기 태종대가 떠올랐다.


태종대! 

거긴 모래 바다가 아니고 자갈 바다야!!

자갈은 좋아할지도 몰라!


미술관에서 스톤아트를 할 때 유난히 돌멩이에 집착하는 아이를 본 기억이 났다. 네 살 무렵 스케치북에 돌멩이만 수십 개를 그린 적도 있다. 화분 위에 얹은 작은 돌멩이를 보고 껴안고 자보고 싶다고 했던 아이. 하늘공원에서 돌멩이를 수없이 주워 온 아이. 


해운대가 아니라 태종대였어! (어리석은 어미의 뒤늦은 깨달음)


태종대에 아빠 손을 잡고 내려가던 아이가 눈앞에 펼쳐진 돌멩이와 바다 풍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제멋대로 생긴 돌멩이들이 바다 앞에 넓게 깔려 있고 파도는 마치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처럼 잔잔하게 밀려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해운대에서는 볼 수 없던 바다 절벽도 아이의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 바로 앞에서 계속 파도를 맞은 돌멩이를 가져와 아이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파도한테 자꾸 철썩, 철썩 맞아서 이렇게 둥글둥글 부드러운 돌멩이가 되었다, 예쁘지. 그러자 아이는 파도한테 맞지 못한 돌멩이를 가져왔다. 이 친구는 안 맞아서, 맞지를 못해서, 파도의 손길을 받지 못해서, 못 생겼네. 


이야기를 듣자 아이는 못 생긴 돌멩이들을 골라 줍더니 바닷가로 나가 파도가 오가는 길목에 놓았다. 집요하게 고르고 또 골라서 그 길목에 평평하게 깔았다. 파도에게 고루 맞아 예뻐지라고. 


딸기우유를 먹으며 돌멩이 위에 풀썩 앉아 바다를 보다가 아이가 그랬다. 


"엄마, 나 여행이 너무 좋아. 부산이 너무 좋아. 다음에 또 꼭 데리고 와줘."


파도에게 맞은 예쁜 돌과 맞지 못한 못생긴 돌을 하나씩 주워 주머니에 넣은 아이에게 이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한다고 하니, 다음에 올 때는 부산 '여행' 말고 부산 '사람'이 되자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부산 사람이 되서 이번에 부산에서 본 것들을 매일 걸으면서 보자고. 부산 구름이 참 좋았었다고. (갑자기 구름 이야기)


** 태종대와 딸 아이 (조회수 4천 영상)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아이가 갑자기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태종대와 돌멩이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느라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여행과 기록. 여섯 살도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이 있으면 저렇게 기록을 하는구나, 싶어 옆좌석에서 놀라워 했다. 아이의 첫 자발적 기록이 다섯 살 겨울 롯데월드의 야간 퍼레이드를 본 날이었으니, 성숙하지 않은 어린이들도 경이와 감동을 경험하면 표현 욕구가 샘솟는 것이리라.


 




태종대를 다녀온 후로 난 딸 아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자식을 키우다 보면 자식 새끼여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아이를 더 좋아하게 될 때가 있는데 여행 동반자로서, 바다를 함께 보는 사람으로서, 여행을 기록하는 종류의 인간으로서, 딸 아이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결혼생활을 하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적당히 매력적인 부분을 느끼며 사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육아도 마찬가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부대끼며 사는 엄마와 딸도 서로의 모습에서 의외의 경이를, 뜻밖의 매력을 느끼며 각자의 고유함에 대해 찬사를 나눌 수 있는 관계로 살아가길 원한다. 


부산의 태종대는 내 아이를 새롭게 보고 바다 앞에 선 꼬마의 모습에 숨 멎도록 감동하게 해준 고마운 바다다. 물과 모래를 싫어하니 이 아이는 바다를 당연히 싫어할 거야, 라고 오해하고 단정했던 내 모습을 반성하게도 해줬고. 바다 앞에 철퍼덕 앉을 수 있는 아이인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부산 여행의 여운이 가신지 한참 지났지만 아이는 요새도 '여행'이라는 말만 들으면 혹시 부산이 아닐까 엄마에게 들뜬 마음으로 물어본다. 차 타고 비행기 타고 오래 걸려도 좋으니까 부산에 가자고.


우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여행들이 아이와 날 부른다. 그 날의 감동을 위해 지금, 머무는 그 자리에서 선하고 씩씩하게 살라고.  



2019년 3세 아이와의 부산여행 (바다를 멀리 보는)
2022년 6세 아이와의 부산여행 (바다와 한몸 된)



** 2020년, 2021년 부산 여행 사진도 올려둘 것





** 여행에 관한 다른 글도 걸어 둡니다 :)


https://brunch.co.kr/@innerjoy0923/147


https://brunch.co.kr/@innerjoy0923/141



2022.10.14

매력적인 여행 동반자, 딸 아이와

부산 태종대를 떠올리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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