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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피스 Mar 24. 2020

행복하지 않아서 행복하답니다



언제부터인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마음이 뭔가 불편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서점에서, TV에서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홍수처럼 쏟아져 피로감이 느껴진 것도 있고, 너도 나도 인생의 가치이자 목적이자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묘한 반발심이 생긴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진짜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이 그 '행복 강박증'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행복을 추구하는 정도를 넘어 거의 집착해왔다. 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집착했고, 대학교 때는 몸매나 관계에 집착했다. 졸업할 때 즈음엔 좋은 직장에 집착했고, 취업을 한 이후에는 더 나은 일을 찾는데 집착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원하는 것을 얻는 순간 인생은 바뀔 것이고, 인생이 바뀌면 곧 행복해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그것이 결핍된 상태라는 의미이다. 즉, 행복에 집착하고 있다는 건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는 증거였다.


그렇다. 나는 내 삶이 불행했다. 현실에서 만족스러운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내가 단점으로 가득한 결함 덩어리처럼 느껴졌고, 어디가 뿌리 인지도 모를 깊은 열등감에 빠져있었다. 자존심은 강한데 자존감은 낮았다. 강물 위 백조처럼 겉으로는 꽤나 고고하고 여유로운 척했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수면 아래에서는 물갈퀴질을 하느라 바빴다.


끝없는 불행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나는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암흑 같은 취준생 시기를 거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원하던 회사, 원하는 부서에 입사했다.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며 통제권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났고, 3개월에 한 번은 출장을 겸한 해외여행을 나다녔다.


목표가 하나 둘 달성되는 순간에는 가슴이 뛰었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어떨 때는 황홀함과 경외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절망의 시작은 바로 그 직후부터였다.


내가 행복이라 여겼던 그 빛나는 감정들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이다. 손에 쥔 모래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는 곧 불행감이라는 디폴트 값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삶의 목표를 갖는 게 무서워졌다. 실패하게 되면 좌절감이 남을 것이고, 성공하면 허망함이 남을 것이었다. 무언가 치열하게 노력하는 게 무망하게 느껴졌고 그렇게 나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행복이라고 느껴왔던 것들이 과연 정말 행복이었을까?'


그래서 내가 행복이라고 퉁쳐버린 감정들을 쪼개어보았다.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싶었던 건 사회적 인정 또는 우월감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좋은 몸매나 외모를 원했던 건 타인의 관심이나 주목을 받고 싶어서였고, 명품 가방이나 비싼 코트는 그저 있어 보이길 원해서 질렀던 것이다. 해외여행을 줄기차게 다녔던 건 새로운 자극이 주는 신선함 때문이었고, 남보다 빨리 승진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더 큰 힘과 통제감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쪼개어보니 더 분명해졌다.

내가 행복이라 정의했던 인생의 목표와 사건들이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난도 고통이지만 즐거움도 고통이라 말한단다. 즐거움을 얻으면 인간은 또 그것에 집착하기 마련이니까. 행복한 삶에 대한 집착이 모순적이게도 내 불행감의 원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며 잡지 <에스콰이어>를 보다가 한 재벌가 출신의 사회적 기업 투자자의 인터뷰를 보았다. 기자가 인터뷰 말미에 '행복하신가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행복하지는 않은데 만족합니다'라고 답을 했다.


나에게는 그의 대답이 꽤나 인상에 오래 남았다.

행복하지는 않은데 만족하는 삶은 어떤 것인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고 몇 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것에 대한 힌트를 또 다른 누군가의 말에서 찾게 되었다.


"행복이란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_홍진경




나는 일단 행복을 포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과 행동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생뚱맞은 시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존에 반복하던 패턴을 바꾸거나 중단해야 뭔가 다른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 싶어서였다.


그 결과는?


'행복이 없는 삶=불행한 삶'이라 여겼던 나의 도식이 깨졌다.


행복이 없어도 인생은 꽤 살만했다. 행복이라는 아주 원대하고 이상적인 목표를 내려놓으니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작은 단위의 감정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연차를 낸 평일 오후 거리에서 느껴지는 평온함이라던가,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에 대한 감사함이라던가, 좋아하던 영화가 재개봉할 때의 설렘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내가 목표로 삼았거나 기대한 감정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새롭게 생겨난 감정들도 아니다. 이것들은 이미 내 안에 존재했었다. 그동안 정체 모를 행복감만 쫓다 보니 내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심리학 용어 중에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이라는 단어가 있다.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학문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바로 '주관적'이라는 표현이다. 이는 행복이란 것이 상황이나 조건에 의해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안녕하다고 느끼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단어가 좋은 이유는 감정에 대한 주권이 나에게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내가 내 삶에 만족하며 well(잘) being(지내고 있다) 고 느끼면 그냥 그런 것이다.


지금 누군가가 나에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행복은 모르겠고 주관적으로 안녕하다고 느끼는 중입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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