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상태로 아침에 일어나 아메리카노를 보약 인양 들이켜대며 하루를 간신히 버틴다.
'집에 가면 씻고 바로 자야지' 결심하지만, 막상 퇴근하면 일만 하다 하루가 끝나버리는 게 억울해 차마 눈을 감을 수 없다.
그렇다고 새로운 취미를 시도할 에너지는 없어, 별로 재미도 없는 넷플릭스를 꾸역꾸역 보며 잠에 든다.
이렇게 나는 n년 간의 직장생활을 버텼고,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만성질환에 시달렸다.
처음에는 회사의 문제라 생각했다.
서로에 대한 평가와 경쟁, 파도처럼 밀려오는 업무,
여기저기에서 터지는 사고와 뒷수습...
이런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뱀파이어가 되어 나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들인다 여겼다.
하지만 3번의 이직과 4개의 회사를 경험하며 깨달았다.
가장 큰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내가 번아웃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회사 안에서의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괴리 때문이었다.
적당한 두께의 페르소나를 쓰고 어느 정도 흐릿하게 자기 정체성을 희석하는 것이 직장생활이라지만 '나 아닌 나'로 사는 건 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었다.
퇴사를 하고 7개월 동안 비(非)직장인으로 살아보니, 내가 직장을 다니며 얼마나 나를 연기하며 살았는가 실감하게 되었다.
| 적응은 잘하는데 적성은 안 맞더라고요
나는 '회사'라는 조직이 나와는 물과 기름처럼 안 맞는다 생각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회사를 다니며 가장 빈번하게 들은 말은 '적응을 잘하네'였다.
신입으로 들어간 첫 직장에서도, 경력직으로 이직한 회사에서도 무던하게 어울렸다. 보수적인 조직이면 세상 조신하게 행동했고, 활발하고 열정 많은 팀에서는 그 텐션에 맞춰 인싸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이제와 고백하자면, 나는 적응한 게 아니고 적응한 척한 것이었다.
알아도 모르는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노잼인데 즐거운 척
쫄보지만 센 척
소심하지만 쿨한 척
무서운데 안 무서운 척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
이렇게 해야 나는 회사를 잘, 그리고 오래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투명하게 속을 보여주는 건 미숙하고 나약한 것이라 여겼다.
| 거짓말과 사회성의 관계
퇴사 후 알게 된 한 아동심리전문가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거짓말을 할 줄 알아야 사회성이 발달해요."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친구가 이상한 머리를 하고 와도 예쁘다고 말해줄 줄 아는 아이가, 넘어져 무릎이 까진 친구에게 호호 불면 나을 거라 말하는 아이가 좋은 사회성을 갖춘 것이 분명하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지나치게 과도한 사회성을 스스로 발달시켰나 싶었다.
속내를 잘도 숨겨왔으니 말이다.
'조만간 이 X같은 회사 그만둘 거다', '그 인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할 거다' 라며 회사생활의 분노와 고충을 토로하는 동료들의 이야기는 돌아가며 들어주었지만, 정작 나는 힘들 때 속으로 삼켰다.
딱히 내 속내를 비밀로 굳게 지켜야지 결심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 감정은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내 개인의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힘들다 말하는 건 징징거리는 것 같았고, 사람이 힘들다 말하는 건 사춘기 소녀의 뒷담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건 괜찮은데, 내가 하는 건 괜찮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사실 다른 사람의 것도 괜찮지 않았다.
겉으로는 '힘들었겠다' 위로했지만, 아마 속으로는 '같은 말 계속 들어주는 것도 지친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것도 동료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직장인으로서 내가 발휘하고 있던 적응기제였을테지.
| 민낯이 참으로 낯설군요
퇴사 후 '명함'이나 '직업명'이 사라질 때만큼 나라는 사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때는 없다.
마지막 4번째 직장을 떠난 후 나를 수식할 수 있는 타이틀이 사라지니, 되게 별 볼일 없는 나체의 인간 한 명이 있더라.
페르소나 뒤에 숨어있던 내가 상당히 낯선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과도기라 생각하고 내 민낯에 익숙해지려는 중이다.
또 사회적응이라는 핑계로 '~척'하는 습관은 조금씩 버리려고도 노력하고 있다.
마음에 안 들면 (용기 내어) 별로라고 얘기해보기.
누군가의 어떤 점이 불편하다는 (뒷담화스러운) 얘기도 해보기.
어려운 건 어렵다고,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며 내 약함을 드러내 보기.
뭐 이런 류의 것들을 의식적으로 실천 중이다.
그러면서 적당한 징징거림과 어느 정도의 뒷담화가 얼마나 큰 유대감과 위로를 주는지 깨닫는 중이기도 하다.
번아웃되지 않고 더 오래, 그리고 너끈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