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너피스 Nov 04. 2019

완벽주의자들이 숨기고 있는 비밀

그 찌질하고 아픈 속내에 대하여

늘 빈틈없이, 실수 없이, 완성형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는 사람, 완벽주의자다. 과거 완벽주의자였던 나는 늘 어떤 일의 기준을 100%도 아닌 120%로 잡았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나 기대 그 이상을 해야만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높은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은 포기하고, 보통 사람 이상의 노력을 해야했다. 결과적으로는 웬만한 일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문제는 그것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가혹해졌다.


어떤 일을 잘 해내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정과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 이후부터는 그 사람이 그 정도 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거나 더 많은 일들을 맡긴다. 과거 학교나 직장에서 어떤 일을 성취한 후 더 많은 일, 더 어려운 일이 주어지면 그것이 하나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나의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해주는 하나의 상장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는 으쓱해하며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노력했고, 더 시간을 쏟고, 더 치열하게 부딪혔다. 열정을 불태우며 성취하는 나 자신에 스스로 취해 일 외에 일상은 그저 후순위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점차 번아웃이 되었다. 때로는 너무 지쳐 쉬려했지만 괜시리 불안하고 쫓기는 마음에 한껏 늘어져있지도 못했다. 그나마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잠시 일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기도 했지만, 그 약빨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의 초자아가 쉬고 싶은 본능으로 몸부림치는 나의 또 다른 자아를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데 지금 쉴 시간이 어딨냐'며  다그치는 것이다. 그 끊임없는 다그침은 결국 내가 다시 일로 돌아와야지만 쓰윽 물러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나는 일로부터 얻은 불안을 일로써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완벽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뱅뱅 돌기만 했다.


더 성공해서, 더 인정받고, 더 높은 자리로 오르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행복은 점점 더 멀리 도망가버리는 느낌이었다. 반대극의 자석처럼 다가가면 물러나고, 다가가면 물러나니 도저히 잡히지 않는 듯 했다. 한 주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야근까지 해버린 어느 금요일 밤, 좀비상태의 몰골로 퇴근길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사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라고.


|타인의 기대는 약한 협박에 가깝다.


이 고통의 굴레에서 헤어나려면 일단 내 지금 문제를 알아야했다. 그 고통의 가장 큰 근원은 완벽주의였다.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는 내 성격이 나를 갈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완벽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왜 내가 완벽에 집착하는지 이유부터 알아야만 했다.


내 완벽주의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기대를 건다는 건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자 동기의 원천이었다. 상대는 나에게 특별히 해준 것 없이 그저 일을 맡긴 것 뿐인데, 나는 무슨 큰 은혜라도 입은 것처럼 그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졌다. '너가 가장 믿을만해서 맡기는거야'라며 큰 선심쓰듯 말하는 윗사람들에게 나는 눈을 반짝이며 감사하다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나는 자각했다. 타인의 기대는 곧 은근한 협박을 의미한다는 것을. 믿고 맡겨준 상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나는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상대가 나에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건 견디기 힘든 수치심을 주었다. 그리고 그 뿌리의 시작은 모든 이가 그러하듯이 바로 부모였다.


어린 시절, 무뚝뚝한 성격에 맞벌이까지 하느라 바빴던 엄마에게 난 늘 따뜻한 관심을 받고 싶었다. 엄마를 기쁘게해드려야지만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가치한 존재처럼 작게 느껴졌다. 심리학 이론 중 하나인 대상관계에서는 엄마가 아이와 맺는 그 첫 관계는 하나의 원형으로 자리매김하여, 그 사람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엄마와의 관계가 계속 재현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야지만 사랑받을 만한 가치있는 존재라 스스로 단정짓게 된 것이다.


|착한 게 아니라 오만한 거예요.


완벽주의 그 밑바닥에 숨은 또 다른 본심은 바로 교만함이었다. 남들보다 늘 많은 일들을 등에 업고 일하는 나에게 가까운 지인들은 일을 좀 나눠달라 하거나 못한다고 거절이라도 해야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에게 일을 거절하거나 나누는 건 많은 일들을 쳐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모든 일을 끌어안고 홀로 해내려는 나를 희생정신과 책임감이 강한 착한사람이라 평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착해서가 아니었다. 그 밑에는 다른 이들이 나만큼 썩 잘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게 못 미덥고 마뜩찮으니 그걸 지켜보는 것보다 내가 후딱 해치워버리는 게 속이 편했다. 후배가 하는 일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보완하거나 수정하면 되는데, 문제는 상사들이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업무능력을 갖춘 상사들도 많았지만, 일을 대충 대충 처리하거나 뭉게고 앉아 요령만 피우는 상사들을 보면 짜증이 솟구쳤다. '선배님들 힘드시니 제가 할게요'라고 말하는 솔선수범 강한 후배인 척 했지만, 사실 나는 그 상사들을 전혀 신뢰하지 못한 채 무시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완벽주의자라는 건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 안에는 이렇게 찌질하고 못나고 가식적이기까지한 진짜 속마음이 숨겨져있었다. 내 안에 이런 불순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고 인정하는데에는 사실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내가 완벽주의의 옷을 벗고 숨통 트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이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모든 이에게 내가 그토록 사랑을 받으려 했을까, 내가 뭘 그리 잘났다고 덤벼댔을까하는 회한이 들었다. 또 완벽을 목표로 버둥거리는 것들이 점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완벽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이고,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불완전한 건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당신이 지나치게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 안에 무가치함, 부족감, 수치심 등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들여다보자. 그걸 직면하는 건 꽤 아픈 과정이지만 그 순간 순간들을 버텨낸다면 어느 새 완벽주의라는 미로에서 벗어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뾰루지만 짜내면 완벽할 줄 알았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