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법
<완벽주의 벗어나기> 실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완벽주의자들에게는 이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완벽주의에 덜렁거림이라는 양극의 성향을 모두 가진 자에게는 그 심적 고통과 폐해가 크다. 100을 목표로 고군분투하지만 어김없이 실수가 세트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커다란 구멍을 발견했을 때의 그 아찔함이란.
| 완벽주의가 내 인생에 끼친 악영향
어찌되었건 지나친 완벽주의가 내 삶에 끼친 악영향은 총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애초에 잘하지 못할 것 같은 일은 시작조차 안한다. 나에게 있어 무언가를 못한다는 것, 실패한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의 결함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내가 너끈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만 하려했다. 모든 일을 내가 잘 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나눈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즉, 능력은 없는데 흥미는 있는 일 말이다. 그리고 내가 잘할 지 못할 지는 끝까지 해봐야 아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실패에 대해 시작부터 겁을 먹고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너무 많았다. 줘도 못 먹냐는 말처럼 좋은 기회가 주어져도 실패할 것 같으면 양손을 내저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성취와 결과만을 기준으로 하니 그 과정 중에 즐거움을 느낄 리는 만무.
둘째, 처음부터 과도하게 시간과 노력을 쏟느라 쉽게 번아웃이 온다. 완벽주의는 강하나 인내심은 별로 없는 성격은 사람을 두 배 빠른 속도로 넉다운 시킨다. 인생은 마라톤인데 자꾸만 단거리 경주로 여기는 것이다. 100m 전력질주 했다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주저앉는다. 또 100m 전력질주 했다가 진이 빠져 다시 한참을 뻗어있는다. 이걸 계속 반복하면 결국 결승지점에 들어가기가 어려워진다. 뭔가 열심히 노력하는 듯한데 그에 대한 보상이나 좋은 결과가 금방 주어지지 않으면 힘이 금세 쭉 빠진다.
그리고는 '역시, 이건 내 길이 아니었나.'라며 쉽게 포기하고 단정 짓는다. 소위 말해 페이스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우리네 인생사에 노력과 성취가 정비례하는 건 생각보다 흔치 않기에, 때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지만 완벽주의자들의 조급함은 이를 견뎌내지 못한다.
셋째,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때 정신적 데미지가 크다. 2018년 매일경제신문은 서울대 학생복지 보고서에 47%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평생을 1등, 완벽한 점수, 성공과 같은 수식어에 둘러싸여 성장했을 그들이 서울대에 와서 A+이 아닌 점수를 받고, 크고 작은 실패와 지적을 받으니 그것이 얼마나 큰 좌절로 다가왔을까 싶다. (물론 나는 서울대 출신은 아니나) 실패의 경험이 부족할수록 실패에 대한 회복탄력성이 현격히 저하된다는 사실은 나와 주변의 뛰어난 인물들을 봐도 알 수 있었다. 9명에게 박수를 받아도 1명으로부터 지적과 비판을 받으면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나 또한 완벽주의기질로 인하여 때로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씩씩대며 변명을 쏟아내기도 했다. 또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내가 왜 그랬지‘라며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감과 수치심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교만함과 자기비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자기를 갉아먹고 있었다.
덜렁대는데 결과는 완벽해야하고 인내심까지 별로 없는 환장할 성격을 가진 나는 결국 이 완벽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로 했다.
|완벽주의자에게는 정량화된 목표치가 필요하다고요
완벽주의에 관한 많은 책들은 하나같이 '부족한 자신을 수용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나 부족해도 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뭐든지 객관적 수치로 계산하는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 부족함의 정도 또한 누군가 정량화된 수치로 제시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책에서도 '그 일은 딱 85%까지만 노력하고, 그 공부는 한 77%까지만 해도 돼요'라고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완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표를 스스로 딱 80%로 설정했다. 90%는 100%과 너무 가까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고, 70%로 잡았다가는 일을 이따구로 하냐며 욕을 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보고서를 만들던 발표를 하던 프로젝트를 계획하던 내 기준으로 80% 정도 도달했다 싶으면 일부러 멈추려고 노력했다.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는 시간과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제 그만-’이라고 제동을 걸게 된 것이다.
이 방법은 결과적으로 꽤 유효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한 것이다. 물론 20%를 채우지 못했으니 초반에는 찝찝함과 부정적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사람들의 평가는 내가 100%를 해냈을 때와 아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예상대로 부족한 부분을 지적 받았지만 그건 다시 보완하면 되는 것이었고, 오히려 다른 동료가 더 좋은 개선책을 제안하여 결과적으로 더 큰 성과물을 만들기도 했다.
|완벽주의라는 덫에서 빠져나와보니
"80% 목표 실천 훈련(?)"을 통해 나는 나름대로 타인의 평가에 점점 덜 흔들리게 되었다. 완벽주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필시 예민할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는 타인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대부분 기인하기 때문에 늘 다른 사람의 생각에 촉수가 곤두서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스스로 완벽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되면서 뾰족했던 예민함이 조금씩 사라졌다.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도 내 스스로 이것이 완벽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 별로 억울하지가 않았다. 예전에는 타인의 부정적 피드백을 들으면 내 노력은 알아주지 않고 흠만 잡는 것 같아 눈물이 찔끔날 정도로 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응 나도 알아, 고칠게'하고 넘겨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과거와 달리 내 존재 자체에 스크래치가 나는 기분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일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완벽주의도 많이 사라졌다. 적성에는 맞지 않지만 흥미는 높은 복싱은 네 달째 나름 성실히 이어나가고 있다. 저질체력에 운동신경도 없어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사람들보다 한참 뒤쳐진 채 혼자 샌드백 부여잡고 헥헥대지만, 아주 미세한 진전에 스스로를 혼자 대견하게 여기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쓰다 말다를 반복하다 애초에 포기했을 글쓰기도 아직은 순조롭게 이어나가고 있다. '작가도 아닌데 멋드러지지 않으면 뭐 어때'하며 그냥 주저리 주저리 써내려간다.
그렇다고 나의 태생적인 완벽주의적 기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 물건이든 정신이든 뭐 하나씩은 흘리고 다니는 덜렁거림 또한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완전함과 불완전함 그 사이 꽤 괜찮은 지점에 정착하여 여유와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 또한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꽤 괜찮은 인간이라는 사실도 조금씩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당신도 완벽주의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면 당신만의 적당한 목표치를 잡고 딱 그 정도만 해보만 해보라. 생각보다 잃는 것은 적고 얻는 것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