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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Jul 07. 2024

영화 《시계태엽오렌지》 리뷰

법과 질서, 그리고 본능과 자유

 고등학생 때 일탈하듯이 찾아봤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 과연 지금 보면 영화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해서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일단 영화와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우선, 깨알같이 레코드샵에서 알렉스가 직원에게 말을 걸 때 2001: 더 스페이스 오디세이》 레코드판이 떡하니 있다. 자기 영화 어필하는 스탠리 큐브릭 조금 귀여울지도.. 쨍한 벽지와 옷차림 등의 미장센은 나 스탠리 큐브릭 작품이요, 하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영화에서는 계속 법과 질서, 본능과 자유 이 두 가지 속성이 대립하며, 과연 강제된 규율로 욕구를 제어하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옳은 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제목인 시계태엽(법과 질서) 오렌지(본능과 자유)부터 두 가지의 대립을 내포하며, 법과 질서로 선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형태만 바꿀 뿐 계속해서 변주하여 보여준다.

 1. 영화 초반에 알렉스 패거리가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했던 노인의 "이젠 땅의 법과 질서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세상"이라는 대사에서부터 법과 질서라는 화두가 제시된다.

2. 본격적으로 수감되기 전 소지품이나 신체 상태 등을 확인하는 절차에서 점점 기계적으로 "No sir", "No sir", "Yes sir" 하고 대답하는 알렉스의 모습에서 시계태엽, 즉 법과 질서가 행사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3. 감옥 안 설교 시간에 누가 방귀 소리를 내고 낄낄거리자 이를 제지하는 목사의 손동작은 마치 나치의 그것 같다. 독일어로 제지를 하는 간수는 어쩐지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콧수염까지!)

 영화의 후반부를 보면 알렉스가 'singing in the rain'을 부르며 나쁜 짓을 저질렀던 그 예술가의 집에 다시 가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예술가 선생이 전화로 루드비코 기술이 "전체주의 사회의 도구로 변할 것"이라 말한다. 루드비코 기법은 본인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은 법과 질서라 볼 수 있고, 그것이 전체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는 영화의 주제의식이 확 와닿게 된다. 그래서인지 어쩐지 나치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곳곳에 있다.

 시각적으로 뿐만 아니라 대사에도 '과연 타인이 부여한 법과 질서로 선에 다다를 수 있는가?'라는 논점이 스며들어있다.

- 저 노력한 거죠? 최선을 다했잖아요? 교도소의 규율을 어긴 바도 전혀 없지 않습니까? (> 규율을 어기지는 않았으며 외면적으로는 변했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았기에 내면은 전혀 변하지 않음)

-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정말 사람을 선하게 만드느냐인데, 선이란 사람의 내면에서 나오는 거야. 선은 선택하는 거야. 인간이 선택을 못하면 곧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지. (알아먹지 못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떠먹여 준다.)

- 저넨 나아야 하니까. 건강한 사람은 가증스러운 일에 두려움과 구토를 느끼지. 자넨 건강해지는 것뿐이야. 내일이면 훨씬 더 건강해질 거야. (>어쩐지 권력이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제한한다고 주장한 미셸 푸코가 떠오른다. 《광기의 역사》에서 광인과 정상인을 구분 짓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푸코처럼,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가에 의구심을 가지게 만든다.)

- 이 친구에겐 선택이 없었던 것 아니요? 나쁜 짓은 멈췄지만 도덕적인 선택이 불가능한 존재가 됐잖소.

 알렉스가 베토벤을 좋아하는 것도,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도 어쩌면 주제와 맞닿은 것처럼 보인다. 겉보기에는 고상한 음악 취향에 성스러운 행동이다. 하지만 속으로는 베토벤을 들으며 악한 상상을 하며 성경을 읽으면서 본인을 악한 자에 대입해서 읽으며 황홀해한다. 강제된 규율을 따를 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법을 따를 수 있지만 내면까지 선함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인가는 또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게 '법과 질서는 필요 없다'나 '비록 나쁜 놈이지만 알렉스는 불쌍하다'가 아니라,  '법과 질서로 사회가 안정되는 것과 진정한 선에 도달하는 것은 별개이다'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것 같다. 너무 알렉스에게 연민을 가지게 만드는 게 쫌 불편했다. 이러니 알렉스 따라 하는 무리들이 생겼지,라는 생각도 들고. 물론 강압적인 루드비코가 나쁘긴 하지만 알렉스도 하등 잘한 게 없지 않나? 멀쩡한 집에 멀쩡한 부모님을 뒀는데 악행을 막 저지른다? 이 놈이 젤 나쁜 놈 아닌가 싶기도. 근데 중간에 그런 인물을 동정하게 만드는 듯한 흐름이 쫌 의아했다. 또 법과 질서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묘사한 것도 의아했다. 개인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이 타인의 안전과 권리를 해치면서까지 보장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들고. 법이 악용될 때가 문제이지 법 자체는 잘못이 없고 오히려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애초에 취지는 약자를 보호하자는 신념에서 시작된 거잖아?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당시 상영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봤을 때는 영화가 그 당시에 보기엔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거에 더해서 너무 노골적으로, 그리고 은근하게 사회 주류들을 비판해서 그런 것도 같다. 영화는 엘리트들, 그러니까 의사, 장관, 간수, 경찰들을 잔뜩 비꼬고 격을 낮춘다. 비인격적으로 느껴지는 루드비코 기법부터 그렇다. 그리고 가령 의사가 간호사와 병실에서 섹스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라든지, 새로 부임한 장관이 여론을 의식해서 태세전환하는 모습과 보여주기식으로 기사 사진을 찍는 모습이나 나치를 연상시키는 간수들의 모습, 폭력적인 경찰들의 모습(알렉스와 어울려 다녔던 패거리들이 경찰이 됨)을 보여줌으로써 엘리트들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보여준다.

  아무튼 지금 봐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작품이자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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