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와 환경'을 고민하는 <경기도서관>을 다녀와서
오래 전, 텃밭에서 막 따온 푸릇푸릇한 상추를 씻을 때의 일이다. 거무스름하고 미끌미끌한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알고 보니 달팽이였다. 달팽이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동심 속 달팽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끈질기기는 또 어찌나 끈질긴지, 아무리 흔들어대도 상춧잎 치맛자락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달팽이가 산다는 건 친환경 채소임을 인증하는 셈인데, 그 맑고 귀한 생명을 대접해도 모자랄 판에 온갖 물고문을 퍼부었다니. 그제야 내가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재빨리 상춧잎에 태워 달팽이를 흙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부디 오래오래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지난 1월 30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에 있는 경기도서관을 방문했다. 2025년 10월 개관한 경기도 광역 대표도서관이다. 9년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완성된 이곳은 개관하자마자 도서관계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북적거림에 대한 망설임도 있었지만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핫플은 한창일 때 가야 제맛이니까.
거대한 규모에 주눅 들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으며 들어선 순간, 뻥 뚫린 천장 아래로 경이로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쏟아졌다. 소문대로 거대한 달팽이의 모습이었다.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혹시, 그때 그?'
순간, 텃밭으로 돌려보냈던 달팽이가 떠올랐다. '친환경 상춧잎을 먹고 불로장생하더니 이렇게 거대한 존재로 환생한 걸까' 엉뚱한 상상이 솟구쳤다.
아래서 보면 달팽이, 위에서 보면 소라
"여기는 5층부터 올라가야 해."
서너 명 무리를 지은 중년 여자들의 대화가 들렸다. 그들 중 한 명의 말에 따르면 5층으로 올라가 전체를 조망한 뒤, 층층이 내려와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 하다는 것이다. 은근슬쩍 합류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향했다.
5층에서 내려다보니 또 다른 상상력이 발동되었다. 아래에서 볼 땐 달팽이였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번에는 영락없는 소라 한 마리였다. 나선형으로 휘감아 내려가는 모양새가 하도 신기해, 이쑤시개 같은 기둥을 쏙 뽑으면 나선형 계단이 소라 껍데기 속 알맹이처럼 줄줄이 딸려 올라올 것만 같았다.
소라라고 생각하니 도서관은 바다를 닮은 듯 했다. 무한한 지식의 보물을 품은 깊은 바다. 사람들은 그 속을 유영하듯 오르내리며 저마다의 보물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오십을 넘긴 나조차 상상력이 이렇게 요동치는데, 아이들은 이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경기도서관을 다녀온 뒤, 한동안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지하 1층부터 5층까지의 모든 공간이 각각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AI 스튜디오'는 직접 이용해 보지는 못했지만, 인공지능과 대화까지 나눌 수 있다고 했다. 달팽이를 닮은 도서관이지만 변화의 속도는 내가 따라가기 버거울 만큼 빨랐다. 그렇게 숨 가쁜 첨단의 공간 옆에는 뭉클한 마음이 느껴지는 공간도 있었다. 경기도 내 장애 예술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관이었다. 그중에서도 한참을 멈춰 서게 만든 작품은 고은미 작가의 <엄마와 포옹>이었다. 훗날 두 딸과 함께 다시 감상하고 싶은 그림이었다.
그 옆 잡지 코너에는 여성지 <쉬즈> 1993년 창간호가 전시돼 있었다. 표지 모델의 갈매기 눈썹을 보는 순간, 그 시절 내 눈썹이 떠올랐다. 지금은 채워 넣어도 모자랄 눈썹을, 그때는 왜 그리 뽑고 또 뽑으며 화장대 앞에 오래 앉아 있었는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났다. 갈매기 눈썹은 한동안 유행이었다. 대학 시절의 졸업 앨범을 펼치는 순간, 광안리 앞바다의 갈매기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면 콘텐츠가 끝도 없이 쏟아지지만, 그 시절 우리에겐 잡지 한 권이면 충분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고민하는 도서관
도서관에 즐길 거리가 이토록 넘치니, 책은 과연 어디에서 읽을까. 경기도서관의 서가 구성은 매우 특이하다.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000 번대부터 900 번대' 서가가 일렬로 펼쳐져 있지 않다. 각 층을 천천히 산책하다가 낯선 골목을 밀고 들어가면 문학과 인문,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이용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게다가 신설 도서관인 만큼, 오래 전 발행된 책들도 새 책처럼 비치 되어 있었다. 은행에서 막 발행된 신권을 세뱃돈으로 받던 순간처럼, 빳빳한 책장을 펼치는 기쁨이 뒤따랐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서가는 1층 북라운지에 마련된 지역 서점 서가였다. 경기도의 작은 서점 책방지기들이 추천한 책들이 정갈하게 전시돼 있었다. 석 달 전 방문했던 '구월서가'의 이름을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개와 고양이에 관한 책들로 채워진 컬렉션에서 책방지기의 내밀한 취향이 느껴졌다. 경기도서관이 작은 지역 서점들까지 배려하는 모습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사실 경기도서관의 모든 공간을 글로 다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너무 크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도서관이 일관되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바로 '기후와 환경'이었다. 단순히 환경 분야의 책을 모아둔 수준을 넘어, 이끼연구소와 기후환경공방까지 갖춘 국내 최대 규모의 기후 환경도서관다운 면모가 곳곳에서 묻어났다.
1층의 북극곰 조형물에서 시작된 메시지는 층을 오를수록 업사이클링 작품과 환경 전시로 변주되며 반복되고 있었다. 빙글빙글 도서관 나선형 계단과 벽면을 감싸고 있는 천연 이끼 '스칸디아모스'도 그 중 하나였다. 습도를 조절하고 공기를 정화하는 기능 덕분인지, 오래 머물렀음에도 실내 공기는 맑게 느껴졌다.
물론, 경기도서관을 모든 이에게 추천하지는 않는다. 공부할 수 있는 좌석이 규모에 비해 넉넉하지 않고, 공간 곳곳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도 자연스럽게 들린다. 통창 앞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거나, 다양한 의자를 옮겨 앉는 재미에 빠진다면 무거워야 할 엉덩이가 자꾸 들썩일 수도 있다. 그러니 단단히 마음먹지 않으면 공부에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조용한 열람실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이 더 적합한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들만 제외한다면,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지순례 하듯 한 번쯤 들러야 할 장소다. 처음 찾은 사람이라면 '세상에 이런 도서관도 있었나' 하고 걸음을 멈추게 된다. 독서 모임을 하러 와도 좋고,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기에도 좋고, 기후와 환경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생각의 방향을 바꿔 놓을 만한 공간이다.
달팽이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이 왔다. 통창 밖으로 어둑어둑한 밤의 색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빛깔이 오래전 달팽이를 돌려보냈던 흙의 색과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 경기도서관을 보았을 때는 흙으로 돌아간 달팽이가 떠올랐는데, 이제는 달팽이를 보면 경기도서관이 먼저 생각날 것 같다.
그나저나 집으로 가려면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 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달팽이가 부러운 이유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