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출해 주는 사람입니다. 대부업체 직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저는 책을 읽고, 대출하는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서 공무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서보조공무직입니다. 이 일을 시작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만 5년이 넘어갑니다. 23년간 사사로운 기업에만 다니다가 공공기관으로 일자리를 바꾸고 보니, 다름이 익숙함이 되기까지 5년이 걸렸습니다. 앗, 제 이력을 소개하기 위한 글이라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는 대출해 주는 사람입니다. 주로 책을 대출합니다. 대출기간은 2주, 20권까지 대출가능합니다. 가끔 연체료를 물어보시는 분이 계시는데, 연체료는 없습니다. 다만 연체하신 기간까지 대출은 하실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신용 강등도 없습니다. 대출정지 기간이 지나면 다시 대출하시면 됩니다. 예약한 책의 만기일은 보통 3일입니다. 대출 만기일이 지났다고 떨지 마세요. 그냥 다음 분께 예약을 양보하시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은행 혹은 대부업체가 아닙니다.
저는 대출해 주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책이 아닌 어쩌면그 사람의 인생. 서사를 대출해 주는 사람입니다.인생서사 대출이라니? 비유가 다소 오버행이 아니냐구요? 저만의 근자감이라 해도 좋습니다. 5년 동안 대출만 하다 보니 생긴 제 직업에 대한 나름의 아이덴티티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직업의 격을 한층 높인 거 같네요. 공무직이라는 직종이 그리 사회적 지위가 있는 직종이 아니다 보니, 스스로 높이지 않으면 자칫 자존감을 잃을 수 있는 직종이니까요.
얼마 전에는 당뇨병 관련 책을 잔뜩 빌려가시는 여자분이 계셨습니다. 어머니, 형제, 어쩌면 본인이 당뇨에 걸리셨나 봅니다.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저리 적극적으로 공부하시는 거 보면, 분명 완쾌하실 의지가 있으신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며칠 전, 아니 어제였네요. 사주 명리학 책을 5권이나 빌려가는 남자분이 계셨습니다. 뒤늦게 명리학에 관심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된 책이라 지하 보존서고까지 다녀와서 책을 찾아드렸습니다.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그분이 명리학을 깨우치실 무렵, 제가 기꺼이 사주마루타라도 되어드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 달 전쯤에는 학생들이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수행기간이라 직업 진로, 수학, 과학에 대한 책들을 잔뜩 빌리더군요. 집에 있는 딸 생각이 나서 함께 찾아주었습니다. 1, 2점만 깎여도 타격일 텐데, 저 학생들의 인생에서 1초라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책을, 아니 인생서사를 대출해 주는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텃밭이 즐거움인 분들에게는 텃밭 관련 책을, 요즘 뜨개질과 옷 만들기에 재미를 붙이신 분들에게는 재봉 관련 책을, 화학자가 꿈인 학생에게는 화학 관련 책을, 새로운 글쓰기에 목표를 두신 분들에게는 글쓰기 관련 책을, 면접을 앞두고 있는 취준생에게는 면접과 자기소개서 책을 대출해 드립니다.
저의 마지막 멘트는 늘 같습니다.
"대출되셨습니다. 반납일은 2주 후 OO일 입니다"
대출할 때 저는 제 진심을 담습니다. 저 책들로 저분들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기를 말이죠. 반납일 때 뵙겠습니다.
앗,
삐 삐 삐~
보안문 앞에서 소리가 납니다. 당황하지 마세요. 책 한 권이 미대출된 모양입니다. 인생의 삑사리쯤은 누구나 있는 법, 다시 대출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