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일린 Jul 03. 2020

이보세요, 라디오 PD 언니

    

“책 잘 안 읽죠?”    


취재원이 기자를 대하는 가장 무례한 발언이 있다면 책을 잘 안 읽냐, 는 말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례한 질문을 받아보았다.        




무더운 여름,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드라마가 있었는데 원작을 쓴 소설가를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더불어 신간을 출간한 라디오 PD와 책을 주제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엮어가기로 했다. 컨택하는 과정에서 취재원들에게 인터뷰 진행 방식에 대한 의견을 정중하게 전달했다.       


인터뷰는 고즈넉한 곳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에서 진행됐다. 라디오 PD가 조금 늦었다. 요란하게 부채질을 하며 등장한 그녀는 연신 “덥다, 더워”를 외치며 미안한 기색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대담 형식의 인터뷰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라디오 PD의 끊임없는 속사포 독백으로 이어지는 중이었다. 일대일 인터뷰였다면 열린 마음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경청했을 텐데 그 자리는 혼자만의 인터뷰 자리가 아니다. 그녀가 새로 발간한 신간이 ‘책’ 관련 이야기라 그런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수많은, 얼마나 심오한 책들을 읽었는지에 대해 간증하듯 쉼 없이 나열을 하더라. 마치 자기가 읽은 책을 한 권이라도 빼놓을 수 없다는 결의에 차서 말이다.      


이러다가는 계획대로 인터뷰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아 그녀의 긴 문장이 끝나자마자 소설가에게로 말을 돌렸다. 그동안 말이 없던 참하고 여려 보이는 소설가는 조곤조곤 말을 시작한다. 할 말이 없어서 못했던 게 아니라 PD에 기가 눌려 말을 안 하고 있던 듯하다. 나는 소설가의 얘기에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깊은 공감을 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소설가 덕분에 소설의 재미를 알게 된 터였다. PD와는 사뭇 다른 그녀의 차분한 어조는 사람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순간 라디오 PD라는 여자가 중간에 툭 치고 들어온다. 당연히 나누고 있던 주제와 관련된 말인 줄 알았다.     


“기잣님, 책 잘 안 읽죠?”    


 그녀는 발음을 세게 강조하며 옹골지게 입을 열었다. 당황했다. 그 자리에서 왜?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거울로 내 얼굴을 확인한 건 아니지만 분명 잘 익은 토마토 같았을 것이다.


“이보세요, 라디오 PD 언니야. 언니가 말한 심오한 책들, 내가 다 못 읽어보긴 했어. 내 취향이 아닌 책들이더라. 사람이 책 읽는 취향이 같을 순 없잖아? 언니가 나열한 우울하고 칙칙한 책 보다 난 밝고 유쾌한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야. 솔직히 당신 책보다는 소설가 언니 책이 훨씬 재미난 거 알지? 그리고 그럼 넌 내가 읽은 책들 다 읽어봤냐? 아닐 걸!”    


라고 던져주고 싶었지만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받아칠 배짱도 없고 인터뷰를 끝까지 진행해야 했으므로. 인터뷰는 어찌어찌 잘 마무리되었다. 돌아오는 길이 영 불쾌했지만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그래. 그래서 지보다 책을 덜 읽었다 생각했겠지. 그리고 설사 너보다 책 좀 덜 읽으면 어때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 라디오 PD의 인터뷰를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로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블로그에서 어떤 작가가 신간이 나왔다며 올린 글을 보게 되었다. 평소 관심이 있던 작가라 어떤 신간이 나온 건가, 책을 클릭해서 보는 순간 십수 년 잊고 있던 PD의 이름을 보았다. 책에 추천서를 적은 듯했다. 그녀의 이목구비가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무례한 말투와 태도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젠 나도 나이를 먹었는지 그 당시 그녀의 태도가 무례했다기보다는 나도 모르게 소설가 언니에게 집중된 모습에 기분이 상했던 걸까,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된다. 자기 책에는 반응이 영 신통치 않고 소설가 책에만 공감하며 대화를 주고받던 모습이 얄미웠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 당시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던 기억들.  뒤돌아보면 여유롭게 웃으며 넘겨지게 된다. 지금의 고민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티타임과 글쓰기, 쓰다보니 셀프 위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