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한테 반찬을 받으러 들렀다 아빠가 방으로 나를 부른다.
“이것 좀 컴퓨터 글로 옮겨줘.”
기밀문서를 전달하듯 아빠는 은밀하게 노트 한 권을 건넨다.
“동창회에서 책 만든다는데 적어 놓은 거야.”
집에 도착해서 노트북을 켜고 적어놓은 글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빠가 건넨 노트에는 아빠의 80년 인생을 뒤돌아보는 글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동안 몰랐던 아빠의 유년시절, 대학시절 이야기가 꽤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언니들과 남동생 우리 네 남매의 아빠, 요리 잘하는 엄마의 남편, 그리고 평생 약을 지어온 약사. 내가 살아오면서 생각해온 아빠의 모습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 손주를 보고 할아버지가 되고 나서는 엄마한테 가끔 혼나는 아빠 정도. 아빠의 입맛을 똑 닮은 큰언니와 함께 있는 모습은 맛집 유튜버를 보는 것 마냥 재미있다. 가부장적인 아빠들도 많다던데 우리 아빠는 고리타분하지 않고 유쾌한 아빠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아빠는 사연이 많은 남자였다. 6남매에 장남인 아빠는 고등학교 때 아빠의 아빠, 나에게는 친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 무거운 짊을 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3학년 담임 선생님 이름은 기억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할아버지의 사업 처리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선생님 이름이 기억 안 날 정도였다고. 부족한 학과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 등 글을 옮겨 적어갈수록 코끝이 찡해졌다.
아빠의 노트에는 약대를 입학한 후 4.19 혁명을 직접 겪은 일이 생생하게 적혀있었다. 역사책에만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빠 대학생 때 이야기였다니. 큰언니네 집 근처에 위치한 4.19 기념관에 들렸다 숙연해진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는 약대에서 늦게까지 실험을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입주 가정교사를 지내던 남의 집으로 가야 했다. 약대 수업, 학사 시험, 약사면허시험, ROTC 훈련 등 놀고먹던 내 대학생활과는 달리 우리 아빠, 참 열심히도 살았다.
돈 부자는 아니지만 자식 부자라는 말과 함께 남은 인생 행복한 가정을 위해 봉사하며 살겠다는 내용으로 글이 마무리가 되었다. 친구 좋아한다고 엄마는 늘 서운해 하지만 가족 생각을 하는 아빠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대학생 때 언니들과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약국을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약국 보는 일은 조금 지루했다. 가끔 친구를 불러 조제실에서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고 비디오를 빌려와 영화감상을 하거나 약사신문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약 정리대에 놓여있는 작은 노트를 발견했다. 아빠가 적어놓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 졸업을 하고 ROTC 임관을 했던 당시의 벅찬 소회를 적어 놓은 글이었다. 생각해보니 아빠는 문학 소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작년, 아빠가 무릎 수술을 받고 며칠 병원에 머무를 때 둘째 언니는 신문을 꼬박꼬박 챙겨 병원에 들렀다. 병실 안에 TV가 있었지만 글을 읽고 싶은 마음에 늘 신문을 찾았다. 나는 내 기사가 실린 잡지 한 권을 가져다 드렸다.
“다 읽어봤는데 글씨가 너무 작더라.”
세월이 흐를수록 노화하는 아빠의 모습은 서글프지만 일본 다이소에서 100엔에 사 왔다며 자랑한 구멍 송송 난 검은 안경과 돋보기를 번갈아 쓰며 무언가를 끊임없이 읽는 아빠의 모습은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