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한 인생

by 아일린


“내가 느희 엄마 머리숱 보고 결혼했잖냐.”


엄마의 새까맣고 풍성한 머리숱에 반해 결혼을 결심한 아빠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많이 듣고 자랐다. 지금 보기에는 연세 치고 그런대로 괜찮은 머리숱이지만 젊은 시절 아빠의 머리숱은 생각보다 겸손했던 모양이다. 엄마 말에 의하면 아빠는 바람결에 머리털이 빠질라 옷도 조심스럽게 입고 머리도 심혈을 기울여 살살 빗었다고 한다.


공주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할 때 아빠는 병원 근처 노지에다 어성초를 키워가며 머리숱을 관리하곤 했다. 손수 키운 어성초가 어느 정도 자라면 거기에 알코올을 적정한 비율로 맞춰 넣어 발효시킨 후 어성초액을 만들었다. 공 들여 만든 어성초액을 직접 사용하는 것은 물론 가족과 지인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어성초가 머리에 그렇게 좋잖냐. 이거 다 완성되면 너도 하나 가져가라.”


아빠는 마루 바닥에 깔아 놓은 신문지 위 짙은 녹색을 뿜어내는 어성초를 앞에 두고 흐뭇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 젊은 시절부터 여든이 넘는 나이까지 손에서 놓지 않는 꾸준한 관리가 아빠 머리숱을 지켜주는 시크릿 노하우인가 보다. 아빠가 어성초액을 만드는 과정을 보며 나 또한 어성초라는 식물을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예민한 내 피부에도 잘 맞는 효과적인 성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빠의 꾸준한 관리 덕분에 덩달아 어성초 성분이 들어간 마스크 팩으로 피부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다.



며칠 전, 아빠 엄마 큰언니와 함께 저녁밥을 먹은 후 근처 카페로 가서 디저트 타임을 즐겼다. 장어를 거나하게 먹고는 팥빙수로 입가심을 하기로 만장일치하고 카페로 들어섰다. 장어와 함께 나온 구운 떡을 연신 먹었더니 치아가 조금 아픈 상태였다.


“아빠, 치아 괜찮아요? 엄마랑 큰언니 괜찮아?”


나의 생뚱맞은 치아 안부에 아빠와 큰언니는 그 정도 가지고 아프냐며 의아해했다. “구운 떡이 좀 질기더라”며 엄마는 부실한 나의 치아 상태를 이해해주었다. 치아 얘기가 나오자 아빠의 단골 소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느희 엄마가 내 이빨 보고 결혼했잖냐. 아빠는 엄마 머리숱 보고 결혼하고.”


엄마의 풍성한 머리숱과 함께 아빠의 건강한 치아 얘기 또한 자식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스토리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머리숱이야 처음 보고 눈으로 판단할 수 있지만 치아는 딱히 확인할 방법이 없는 디테일한 부분인데 어떻게 치아가 건강한지 알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엄마가 아빠 만나기 전에 선을 봤는데 그 사람 앞니가 철로 테를 두른 치아였어. 예전에는 미적인 부분은 크게 신경 안 써서 철 소재로 치아를 했던 사람이 많았거든. 그런데 그 모습이 별로더라고. 아빠는 그런 이가 하나도 안 보였어.”


아빠를 만나기 전 철로 테 두른 치아를 가진 아저씨 덕분에 언니들과 나, 남동생이 태어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도 모르는 엄마의 과거 맞선남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긴다. 결론은 아빠의 튼실한 치아와 엄마의 탐스러운 머리숱 덕에 두 분은 결혼을 했고 우리 4남매가 탄생한 것이다.



“조금 따끔합니다.”


콧대가 오뚝하고 끝이 살짝 뾰족해 보이는 지적인 인상의 여자 의사가 언질을 준다.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려는 찰나 이미 마취 주사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잇몸을 쑤시고 들어온다. 아들이 이곳 치과에서 마취 주사를 맞을 때 자지러지게 울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이면 되는데 왜 그걸 못 참니,라고 핀잔을 줬었다. 잇몸으로 퍼져 나가는 마취 약 기운과 함께 아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져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윽”

“네, 안쪽은 됐습니다. 바깥쪽 놓을게요.”


아, 그렇지. 마취 주사는 안쪽 바깥쪽 골고루 다 놓아야 하는 거였지. 고통이 끝난 줄 알고 마음을 놓을 무렵, 또다시 주사 바늘이 바깥쪽 잇몸을 파고든다. 나의 잇몸은 순식간에 무아지경에 빠졌다. 입에서 윽, 하는 신음 소리가 한 번 더 세어나간 후에야 고통이 끝났다. 아니, 무감각해졌다. 간호사가 몇 분 간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한다. 왼쪽 끝 어금니의 잇몸 마취일 뿐인데 왼쪽 얼굴 전체가 얼얼한 느낌이다. 그 비현실적인 기분은 왼쪽 혀까지 마비시켰다. 고통이 마비되니 몽롱한 상태에서 주변 것들이 들리고 눈에 들어온다. 잔잔한 클래식 선율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내 잇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고 벽에 걸린 풍경 사진은 공포스러운 치과에서 평화로운 여행지로 공간 이동을 시켜준다. 눈이 감긴다. 스르륵 잠이 온다.


“금으로 때운다고 했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정도 치료가 마무리되었나 보다. 작년 9월부터 시작한 치과 치료는 왼쪽 끝 위 어금니, 그 앞 어금니, 오른쪽 끝 위 어금니 그리고 오늘 치료한 왼쪽 끝 아래 어금니를 마지막으로 고단했던 기나긴 여정의 마무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11개월 간의 치료를 마무리하며 고생한 내 치아와 잇몸을 격려하고자 반찬 가게에 들렀다. 꽁치, 두부 그리고 부드럽게 삶아낸 시래기나물을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가글액으로 입을 한 번 더 헹궈낸 후 마취가 풀리기를 기다린다. 오드득, 오드득 경쾌한 리듬을 타며 딱딱한 누룽지를 즐겨 먹는 아빠가 무척 부러워지는 하루다. 나의 치아는 아빠 대신 엄마의 유전자를 받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새까맣긴 한데 조금 아쉬운 머리숱은 엄마 대신 아빠의 유전자를 받은 모양이다. 어찌 반대로 물려받다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다.




사진=정은채 SNS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