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일린 Oct 24. 2021

마흔, 불편함도 꿀꺽 소화시키는 나이

  

그녀와 나는 중학교 동창 베프 덕에 급속도로 친해졌다. 동창의 오랜 ‘동네 엄마’인 그녀는 나보다 7살 많은 40대 중후반을 건너가고 있었다. 우연히 술자리를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는데 만나자마자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머나, 우리 J 동생 친구구나.”     


우윳빛 뽀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친근하면서도 고상한 듯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아이를 통해 알게 된 동네 엄마들이 몇 명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를 통한 만남이었기에 보이지 않는 선이 늘 존재했다. 하지만 친구를 통해 알게 된 그 언니는 내 아이를 통해 만난 관계가 아니어서인지 부담 없이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이후 술자리를 몇 번 더 같이 하며 친해지게 되었는데 급기야 중간 다리 역할을 했던 친구 없이 단 둘이 만나는 계기가 몇 번 생겼다. 쇼핑을 좋아하는 그녀는 어느 날 점심을 먹자마자 쇼핑을 하자며 신나게 백화점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여자라면 어느 정도의 쇼핑은 익숙해서 불편할 건 없었지만 오로지 본인의 취향대로 쇼핑 삼매경에 빠진 모습에 영혼 없이 끌려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어떤 운동화를 살지 결정을 못하다가 두 가지 운동화 중 어떤 게 어떻게 예쁘냐며 디테일한 질문을 던져왔다. 기가 쏙 빠진 나는 애써 웃으며 최선을 다해 답변했다.     


“언니가 두 개 다 탐이 나셨나 봐요~”

“얘, 탐이 난다가 뭐니?”

“네? 왜요?”

“그 단어는 내가 너한테는 사용할 수 있지만 네가 나한테 사용하면 안 되는 단어 아니니?”     


그녀의 다정한 말투가 꽤 싸늘하게 변했다. 헐. 이게 무슨 궤변인지. ‘탐나다’라는 뜻을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가.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 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 단어가 윗사람 아랫사람 구분하며 사용해야 하는 민감한 단어였던가. 설사 그렇다 해도 그녀와 나는 회사에서 만난 상사와 부하직원 관계도 아니고 학교 선후배로 만난 관계도 아니다. 말 그대로 동네에서 술 한잔 마시다 친해진 관계인데 무슨 상하관계를 따지려 드는 건지 그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내 입을 통해 나오는 단어를 몇 가지 지적했다. 누구나 평상시 사용하는 흔한 단어에 대해 노여워하는 모습에 내가 이상한 건가, 주변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만남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단둘이 만나는 것보다 친구와 셋이 보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던 중 친구는 대학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났고 자연스레 그녀와 나도 멀어지게 되었다.      




“너 어디야? 언니랑 같이 있는데 나와라.”     


유학 다녀온 친구로부터 얼마 전 연락이 왔다. 더불어 잊고 있던 그 언니의 단어 지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나이 마흔에 사적인 자리에서 조차 눈치 보며 대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관계에 이끌려 불편함을 감내할 만큼 체력도 받쳐주지 못했다. 만나면 힘만 빠지는 편치 않은 만남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의 환한 미소와 함께 그 언니의 다정했던 말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그 언니가 단어 지적만 안 한다면 더없이 괜찮은 언니지.’     


용기를 내서 그녀들이 있다는 카페에 도착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예전이랑 똑같네~”     


어색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가 말을 건네 와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 친구와 그녀의 대화를 주로 듣기만 했다. 그 언니가 어떤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할지 몰라 그저 그들의 대화를 관찰만 했다. 덕분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는데, 나한테 했던 것처럼 친구에게도 조언인 듯 지적인 듯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말투 중 저런 말투도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과거의 내가 예민했던 건지, 지금의 내가 관대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 불편한 감정이 희석된 건 사실이다. 살다 보면 죽마고우와도 불편한 순간을 마주하기 마련인데 나이 들어 갑자기 친해진 그녀와 그런 시간들을 가지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던 그녀를 오랜만에 만나보니 과거 불편했던 감정들이 어느 정도 소화되는 느낌이다. 마흔의 위력인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 산행 후 달콤 쌉싸래한 막걸리 한 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