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눈길을 사로잡는 한 권의 책 소개가 올라왔다. 엄마 나이와 엇비슷한 70대 할머니가 쓴 책이다. 가만 보니 한 달 전 출간 투고 메일을 정중하고 깔끔하게 거절한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 듯싶다. 마음 같아서는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어느 순간 ‘좋아요’를 누르는 물러터진 내 검지 손가락을 발견했다.
채도가 낮은 은은한 민트색 바탕에 조쌀하게 나이 먹은 멋쟁이 할머니가 그려진 표지는 책 제목과 무척이나 잘 어우러진다. 표지를 넘기면 어떤 내용으로 속을 꽉 채웠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서점에 들르게 되면 한 번 봐야지 하고는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다.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는 제목만으로도 이미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십 대에 접어든 나는 이삼십 대들처럼 상큼하게 예뻐지고 싶은 노탐보다는 곱게 나이 먹고 사물과 상황에 대해 편안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온유한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 더 매력을 느끼고 닮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물론 나이가 많다고 해서 마음의 평화가 절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자애로운 태도를 가질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공짜로 먹은 나이에 대해 나잇값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젊고 파릇파릇한 여배우들도 물론 예쁘지만 내 눈에는 연륜과 경륜이 쌓인 메릴 스트립과 줄리안 무어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삼십 대 친구들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자리를 내어준 대신 그녀들처럼 그 빈자리를 안정감 있고 여문 내면으로 채워가고 싶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의 장명숙 할머니, 밀라논나(밀라노 할머니)는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놓아야 타인의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고 전한다.
은빛 백발의 커트머리 할머니가 멋지게 미소 지으며 패션 아이템을 소개해주고 명품 브랜드의 역사에 대해 재미나게 술술 이야기를 풀어주는 동영상을 보면서 시니어 유투버 밀라논나의 매력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내가 오랜 시간 좋아하던 브랜드를 1990년대 한국에 론칭한 패션계의 거물이란다. 밀라논나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 단순히 디자인이 예뻐서, 가죽이 튼튼해 보여서 선택한 아이템들에 대한 가치와 역사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여행으로 풀지 못한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풀어보고자 가방 하나 들여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새로운 것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녀가 평생을 쌓아온 패션 지식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사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지혜로운 시선을 배우고 싶다.
오랜 시간 패션계의 최전선에 있었고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밀라논나에게 사람들은 좋은 옷 구매하는 방법, 패션 센스 등을 물어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명품을 쫓기보다 나 스스로 명품이 되면 됩니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주옥같은 말들을 경청할수록 백화점 오픈런을 해야 구매할 수 있는 C사의 가방을 손에 쥐는 대신, 그 브랜드를 탄생시킨 디자이너의 위인전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돌체 앤 가바나’의 도미니코 돌체와 젊은 시절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함께 패션 공부를 했던 그녀에게 H 여배우는 본인이 질투 난다며 질문 하나를 던졌다.
“선생님, 선생님도 명품 브랜드 하나 만들었어야 했어요. 젊었을 때 같이 패션 공부했던 친구들이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모습 보면 질투 나지 않으세요?”
“전혀요. 나는 대신 아들이 둘이나 있잖아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대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과 그 여유가 진정으로 멋스럽다.
어느 날 아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엄마, 내가 크면 엄마도 할머니 되는 거야? 할머니 안 됐으면 좋겠어.”
“응? 엄마는 예쁜 할머니가 될 거야. 예쁜 할머니는 괜찮지?”
걱정 어린 표정으로 질문하던 아들의 얼굴이 이내 밝아진다. 아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곱고 예쁜 할머니가 되어야 할 텐데. 밀라논나의 책에 소개된 라인홀드 니부어의 <평온을 비는 기도>를 가슴속에 되새기며 살아가야겠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