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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Nov 12. 2021

가을 산행 후 달콤 쌉싸래한 막걸리 한 잔

울긋불긋 화려한 가을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설악산 풍경이 눈을 홀린다. 봄에 피는 새하얀 벚꽃을 볼 때도 호사스러운 기분을 만끽하는데 가을에 보는 단풍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다채로운 색으로 즐거움을 주는 자연의 이치에 새삼 감사하다. 설악산에서 속초 시내를 내려다보니 인간관계에서 오는 일상 속 스트레스가 하찮게 여겨진다.   


“아빠, 막걸리 하나 시킬까요?”

     

설악산에서 내려온 후 순두부 집에 들렀다. 순두부, 황태구이, 감자전을 주문하고 주변 분위기를 쓰윽 살펴보니 막걸리를 곁들여야 할 것 같은 당연한 기조가 흐른다.      


“여기는 막걸리 종류가 뭐 있나? 안주가 너무 좋아서.”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메뉴판을 펼쳐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안주가 좋아 막걸리를 마신다기보다 원래 막걸리를 좋아하는 우리 아빠. 여름철 장어를 먹을 때도, 아귀찜을 먹을 때도 큰언니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부녀가 나란히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딸 셋 중 입맛 싱크로율 100%를 자랑하는 큰언니는 신기하게 좋아하는 술 취향마저 아빠와 똑 닮았다.      


20대 중반 즈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막걸리를 마신 적이 있다. “요구르트네, 요구르트야”를 연발하며 맥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었다. 누구와 어디서 마신 기억조차 흔적 없이 사라진 그날의 기억. 다음날 숙취의 괴로움에 몸부림쳤던 형상만 덩그러니 남은 채 막걸리는 내 인생에 들여서는 안 될 요물로만 치부하며 살았다.     


한데 설악산 등반 후 오랜 시간 지켜온 지조를 굽히고 말았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울긋불긋 매혹적인 단풍, 막걸리 좋아하는 아빠와의 등산. 모든 게 맞춤했다. 막걸리 마시기 딱 좋은 날, 그렇게 막걸리와 20년 만에 조우하게 된 것이다.


뽀얀 막걸리가 담긴 잔을 들고 조심스레 한 입 홀짝였다. 20년 전 맛본 기억과 같은 요구르트 맛이 혀를 감싼다. 다시 한번 홀짝였다. 달짝지근함 뒤 바로 착 달라붙는 쓴맛에 눈이 번쩍 뜨인다.      


“이야, 좋다.”

“설악산 정기를 받아 더 좋은가보다.”     


엄마 말대로 자연의 웅장한 기운이 더해져 달콤 쌉싸래함의 풍미가 입속으로 들어와 온몸 구석구석 휘감는다. 막걸리 한 모금에 융숭한 대접을 받은 기분이다. 산행 후 마신 막걸리의 잔향은 집에 돌아와서도 며칠을 갔다.      


“큰언니, 언니랑 아빠가 왜 그렇게 막걸리를 좋아하는지 이해 갔어.”

“너도 드디어 막걸리 마실 나이가 된 것이야. 사람들이 등산 후 괜히 막걸리를 마시는 게 아니지.”     


사계절 자연의 모습을 수채화처럼 담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혜원(김태리)은 제철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면서 엄마의 삶도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마음도 다독거린다. 추운 겨울, 그녀는 쌀과 누룩으로 막걸리를 만들며 어린 시절 엄마와의 추억 속에 잠긴다. 엄마 앞엔 막걸리 한잔, 혜원 앞은 식혜가 놓여있다. 엄마가 마시는 막걸리 맛이 궁금한 어린 혜원은 엄마의 막걸리를 한 입 축여보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혜원의 입에 막걸리는 그저 어른의 맛이다.      


시간이 흐른 후 막걸리 맛을 제대로 알게 된 그녀는 엄마의 레시피로 손수 수제 막걸리를 만든다. 밥 위에 누룩을 넣고 손으로 치대면서 “식혜의 엿기름은 단 맛을 내지만 막걸리의 누룩은 어른의 맛을 낸다”고 말한다. 영화 속 혜원보다 숫자 상 훨씬 더 어른인 나는 이제야 뒤늦게 ‘어른의 맛’에 눈을 떴다.     


“최고의 안주는 알싸한 추위와 같이 나눠 마실 사람”     


혜원의 말이 맞다. 깊어가는 가을, 코끝에 스치는 차갑지만 신선한 공기와 함께 가족들과 나눠 마신 막걸리 한잔에 충분한 행복감을 느낀다. 언젠가 양재동 막걸리 맛집을 영혼 없이 취재한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막걸리 맛집을 취재할 일이 생긴다면 진심과 열정을 꾹꾹 눌러 담아 근사하게 막걸리 기사를 써낼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어른이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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