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추운 겨울, 김포공항. 게이트가 열리자 솜사탕처럼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손을 살살 흔들며 인사를 건넨다. 날씨 때문인지 뜨거운 환호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두 뺨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영화 홍보 차 한국을 방문한 그와 그를 취재하는 수많은 취재진 중 한 사람이었던 나. 나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서운한 거 한 개도 없다. 현실 눈앞에서 그의 비현실적인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고 은혜로운 날들이었으므로.
2박 3일 영화 홍보 일정을 따라가는 취재였는데 장소는 첫날 김포공항, 둘째 날 하얏트 호텔, 셋째 날 삼성역 메가박스에서였다. 매너와 미소에 취해 정신줄을 놓으려다가도 실시간으로 기사를 올려야 했기에 길바닥에 털썩 자리 깔고 앉아 부리나케 기사를 써 내려가기 바빴다.
둘째 날 하얏트 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다시 만난 그는 하루 만에 구면이라 더 반가웠고 불특정 다수가 있던 공항이 아니어서인지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나 혼자 프라이빗한 만남처럼 느껴졌다. 이쯤 되니 전혀 일 하는 것 같지 않은 기분마저 들었다. 심지어 마지막 날 삼성역 메가박스에서 진행된 레드카펫 행사는 사진 기자 단독으로 촬영해도 무리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발적으로 취재를 강행하는 스스로의 어이없는 모습을 발견했다.
얼마 전 영화 <탑건:메버릭>을 관람했다. 어느덧 주름살이 잡힌 그의 얼굴은 첫 만남 그대로의 모습에 중후함까지 더해져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을 발산하더라. 원작을 보진 못했지만 이질감 없는 연계성 덕에 이해가 수월했고 영화 채널을 통해 포스터와 스틸 컷을 많이 봐왔던 터라 오버랩되는 장면이 꽤 많았다. 때문에 영화 보는 내내 나보다 연세 있으신 언니 오빠들처럼 괜한 추억에 잠겨 보기도 했다.
24살 톰 크루즈를 세계적 스타로 자리매김해준 항공 액션 블록버스터 <탑건>의 후속 편이 30여 년 만에 나왔다는 것 자체로 이미 반은 먹고 들어간 건데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만큼이나 실속 있는 영화다. 꼬맹이 때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수없이 듣던 ‘Take my breath away’가 흘러나왔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Danger zone’으로 오프닝 음악을 깔며 시선을 사로잡은 것으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조셉 코신스키 감독은 전작을 진심으로 존중했으며 <탑건>의 오랜 팬들을 세심하게 배려한 면면들이 돋보였다.
“Don’t think. just do it!”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 루스터를 향해 메버릭은 “일단 그냥 해!”라고 외친다. 너무 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일이 추진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의 명대사를 떠올리기로 다짐했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면 되는 거다.
영화 관람 후 의식적으로 톰 오빠와의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그를 만났던(허허허) 시절은 잡지사가 아닌 인터넷 신문사에 다니던 시절이라 손쉽게 기사 검색이 가능하다. 관련 기사를 두세 개 정도 작성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10개 정도 작성했더라. 기사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 흑심으로 가득 찬 모양새가 역력하다. 기자라면 객관성을 갖춰야 하는 것이 기본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취재원의 매력에 흠뻑 빠져 찬양 글을 써 내려갔던 것이다. 쓰다 쓰다 톰 크루즈의 패션까지 전문가인 척을 하며 분석해놓은 기사는 종이 기사로 내 눈앞에 있었다면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느껴졌다.
당시 김포공항에 12시 40분경에 도착하기로 한 그가 기상 악화 이유로 2시 40분 정도에 도착했는데 그 내용까지 짧은 기사로 적어냈다. 기다리는 동안 개봉 영화 자료를 더 찾아보고 준비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을 설레는 사적 마음이 들킬세라 일하는 중이라는 걸 회사에 보여주기 위해 기사를 쥐어짜듯 썼던 얄팍한 본심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탑건:메버릭>이 쏘아 올린 톰 오빠와의 추억은 지난날 영화 기사를 하나하나 꺼내보는 것으로 시작됐고 그의 영화를 보며 자라온 나는 배우와 함께 나이 먹어가고 있음에 새삼 만감이 교차한다. 추석 연휴, 아들과 TV 앞에 나란히 앉아 세대를 아우르는 톰 크루즈의 빛나는 액션 연기를 보고 있자니 이것 또한 인생을 살아가는 잔재미 중 하나인 것 같아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