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발표장이었다.
다른 학생이 상자그림을 띄웠다. 조선 왕비와 후궁의 수명을 본다고 했다. 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 가로줄이 그어져 있었고, 위아래로 수염이 뻗어 있었다. 점 몇 개가 바깥쪽에 따로 찍혀 있었다.
나는 학생에게 설명해 보라고 했다.
학생이 말했다. 가운데 줄은 중앙값입니다. 상자의 아래쪽 변은 1사분위수이고, 위쪽 변은 3사분위수입니다. 수염의 끝은 최솟값과 최댓값이고, 바깥에 찍힌 점은 바깥값입니다. 이렇게 다섯 개의 숫자로 데이터를 요약합니다. 학생은 또박또박 말했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그래서 이 그림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고.
학생은 잠시 멈췄다가 같은 말을 다시 시작했다. 가운데 줄은 중앙값이고, 상자의 아래쪽 변은 1사분위수이고⋯. 처음과 같은 문장이 같은 순서로 다시 흘러나왔다. 나는 학생을 멈췄다.
학생은 상자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출력한 것이었다. 그리고 출력된 그림의 정의를 읊고 있었다.
정의는 그림이 아니다. 정의는 그림을 만드는 법이다.
상자그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과 이 상자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는 교과서 한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는 것이고, 후자는 그림 앞에 서서 그림과 대화하는 것이다. 학생은 전자를 했다. 후자는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림과 대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중앙값이 상자의 한가운데에 있는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가. 치우쳐 있다면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는가. 수염은 위아래가 대칭인가, 한쪽이 긴가. 한쪽이 길다면 그 긴 쪽에 무엇이 있는가. 바깥값은 몇 개이고, 누구인가. 그 바깥값들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다. 인목왕후인가, 정순왕후인가, 아니면 스물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난 어떤 후궁인가. 왕비와 후궁을 나란히 놓았다면, 두 상자는 같은 자리에 있는가, 어긋나 있는가. 어긋나 있다면 그 어긋남은 우연인가, 구조인가.
이 질문 중 하나라도 학생이 스스로 떠올렸다면, 발표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나는 그 질문들을 학생에게 하지 않았다. 질문은 내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질문을 대신 해 주면 학생은 대답을 배운다. 그러나 배워야 하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림 앞에서 스스로 질문이 떠오르는 감각, 그것은 누군가가 옆에서 자꾸 물어봐 주는 경험을 통해서만 생긴다. 4년 동안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그 자리에서 한 번 한다고 해서 생기지 않는다.
학생은 그림을 본 것이 아니라 그림 옆에 서 있었다.
둘은 비슷해 보인다. 화면을 향해 몸을 돌리고, 화면의 무언가를 가리키고, 설명을 하고 있으면, 본 것처럼 보인다. 발표장 안의 누구도 그 차이를 지적하지 않는다. 지적할 수 있으려면 지적하는 사람도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표는 그대로 끝난다. 다음 학생으로 넘어간다. 학생은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자신이 그림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상자그림은 요약이다. 그러나 요약은 요약된 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이다. 다섯 숫자는 손가락이다. 손가락은 달을 가리킨다. 손가락을 보는 사람은 달을 보지 못한다. 학생은 손가락을 설명하고 있었다. 손가락의 마디가 몇 개이고 길이가 어떻고 손톱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달은 그 뒤에 그대로 떠 있었다.
상자그림을 믿었다. 다섯 숫자를 믿었다. 그 다섯 숫자가 요약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을 믿었다.
믿으면 틀린다.
같은 발표장에는 또 한 장면이 남아 있다. 이번에는 그림이 그려지기도 전의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