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있는데 유독 눈에 띄는 한 공간을 발견했다. 아주 협소한 1인 사무실로 보였는데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불이 켜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작은 방문이 열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왜소한 체격의 여성분이 인플루언서들이 쓸법한 조명과 바퀴 달린 행거를 낑낑대며 옮기고 있었다. 낯선 외국에서 영어 능력 대신 친화력만 키워온 지난 세월이 본능적으로 뇌에 지시했다.
'지금이 기회다. 친해질 기회.'
의도를 숨기고 자연스럽게 빠른 걸음으로 접근하여 도와드렸다. 그분이 가볍게 목례하셨을 때 내면 깊숙이 꾹꾹 눌러두었던 호기심을 방출했다.
"죄송한데 혹시 어떤 일을 하시는 거예요?"
짧게 답할 만도 한데 자신을 도와준 것 때문일까 꽤 자세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해주었다. 살면서 처음 마주한 직업이라 흥미가 생겨 작가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커리어 관련 콘텐츠를 쓰는데 혹시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요?"
마치 그 옛날 압구정동에서 '혹시 방송일 해볼 생각 없냐?'고 묻는 엔터테인먼트사 스카우트처럼 말이다.
"최근에 일이 많은데 조금 고민해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며칠을 고민하시더니 결국 동의를 얻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Q. 본인소개 부탁드려요.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사실 라틴어 '데시그나레'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해요. 데시그나레는 '지시하다, 의미하다'를 뜻하는 말로 어원적 구조는 "~을 분리하다, 취하다"를 뜻하는 'de’라는 접두어와 "기호, 상징"을 의미하는 'signare’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졌죠. 기호와 상징은 어쩌면 오랜 기간 굳어진 체계이자 고정관념과도 같아요. 저는 오랜 기간 너무나도 당연한 관습처럼 받아들여진 상품 혹은 라이프 스타일을 다시금 현대적인 시각에서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재해석하고 재조정하는 디자이너입니다.
Q. 학창 시절(고등학교)에 김선우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당시 친구들 중 지금도 연락하는 분이 있나요?
학창 시절 저는 삐쩍 마른 몸에 성격이 급한 아이였죠. 뭐든 뜻대로 하고 싶은데 체력이 약하니 가족들이 늘 불안해했어요. 그래도 친구들이랑 매우 잘 지냈는데 그중 저와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들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요. 그중 한 명은 무대의상 공부하러 이태리에 갔는데 현지에서 배필을 만나 그곳에서 정착했어요.
ⓒLufthansa
지금은 외국 항공사 기내에 들어가는 한식을 기획하고 있어요. 탑승객들에게 제공되는 기내식은 사실 대부분 냉동된 상태에서 데워서 제공되죠. 그 친구의 최대관심사는 그 과정에서 모양이나 맛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고 탑승객들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최고의 식도락 경험을 제공하는 거예요. 지금도 그 친구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들어요. 살다 보면 인생의 변곡점을 거치며 애초의 계획한 경로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즐길 수 있다면 그 역시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싶어요.
Q. 연세대학교에서 의생활학과를 전공하였는데 전공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사실 저는 신문방송학과를 지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시 아버지가 경제부 기자여서 그랬는지 여자가 기자를 하기에는 너무 거친 직업이라고 상당히 반대하셨고 차선책으로 건축공학과를 지원하고자 했는데 그마저도 제가 고생할까 봐 반대하셨어요. 그렇게 제가 하고 싶은 것마다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포기했어요. 너무 답답한 나머지 가족들에게 말했죠.
"나 그럼 다 때려치우고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래서 부모님과 오빠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제안한 게 의생활학이었어요. 저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었어요. 부모님이 제가 가급적 고생하지 않길 바라며 의생활학을 권하셨는데 막상 해보니 이것만큼 노동집약적인 일도 없었죠. 대학 생활하는 동안 어느 날은 천을 자르고, 어느 날은 패션 일러스트를, 또 어느 날은 섬유 화학을 배우며 버라이어티한 커리큘럼을 소화했어요. 40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비록 당시의 전공 수업은 무척 힘겨웠지만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저라는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거예요.
Q. 당시 대학생활은 어땠나요?
저는 대학을 1984년에 들어가서 1988년 2월에 졸업했어요. 당시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군사정권 시대여서 시위로 인해 대학가가 조용한 날이 없었어요.
ⓒ연세춘추
연막탄과 최루탄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어쨌거나 수업은 가겠다고 길을 나섰죠. 한번은 전경이 길을 막아서고 소지품 검사를 하는데 여학생도 예외가 아니라며 가방을 뒤졌어요. 가방을 헤집던 전경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저를 갑자기 쏘아보기 시작했어요.
“가방에서 가위가 왜 나와? 너희 이거 무기로 쓰려는 거 아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런 대답을 못 하는 저를 발견한 친구가 나서서 말했어요.
“가위를 쓰면 어디에 쓰겠어요. 수상한 남학생들이 추근대면 거시기 자르려고 가지고 다녀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 친구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저는 그 친구가 괜히 전경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등골은 서늘해지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정작 전경은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덩달아 웃었어요. 친구의 다소 무모하면서도 뛰어난 기지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하고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죠.
100주년 티셔츠를 입고 캠퍼스에서, ⓒ조인후 '커리어를 끄는 사람들'
그런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학 생활은 그 자체만으로 너무 아름다운 기억이었어요. 대학 2학년 때가 개교 100주년이었는데 ‘내가 정말 운이 좋구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웠던 기억이 가득해요. 연고전의 기억은 아직도 동기들과 만나면 매번 언급되는 주제에요. 그리고 연대가 기본적으로 개방적인 분위기로 자유로운 학풍이 매우 강하지만 미션스쿨이다 보니 공식적인 교육목표는 기독교 정신의 함양이에요. 그래서 채플이 의무이기는 하지만, 채플 시간에는 당시 인기를 누리던 가수들의 공연들도 종종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름다운 캠퍼스가 주는 정서적인 위안도 제가 누린 혜택이라고 생각해요. 당시에 책은 이문열, 가요는 이문세의 전성기였고 이들이 제공하는 것들이 당시 삶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어요. 비록 과제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학과라 밤새우는 게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어요. 그런데 지금은 대학생들이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준비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너무 안쓰럽고 앞서 누렸던 세대로서 미안함이 커요.
대학교 졸업사진 촬영, ⓒ조인후 '커리어를 끄는 사람들'
Q. 졸업 후 패션 디자이너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어땠나요?
맨 처음에는 디자이너 브랜드에 들어갔어요. 당시 그 디자이너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았고 상당한 부도 축적하셨어요. 제 개인 브랜드를 만드는 게 목표라서 당시 가장 주목받는 디자이너 브랜드에 간 거죠. 여기는 도제 방식으로 훈련해서 디자이너를 길러요. 사내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디자인할 기회를 얻으려면 눈치가 빨라야 하는데 저는 둔했어요.
직장동료들과 해외 출장, ⓒ조인후 '커리어를 끄는 사람들'
하지만 그때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생산의 흐름을 보고 배운 게 나중에 아주 요긴하게 쓰였죠. 다양한 원부자재의 이름을 외우고 어디서 구매하고 어떤 작업에 쓰이는지 그것만 익히기에도 바빴어요. 그러다가 협력 공장에 가보면 최첨단 특수 봉제 기계들이 있고 평범해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기가 막힌 솜씨로 자수를 놓고 미싱을 돌리는데 정말 감탄에 감탄했죠. 그 어떠한 이론보다 현장이 주는 지식이 필요한 게 디자이너예요.
Q. 이후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였는데 무엇이 계기가 되었나요?
옮긴 이유는 일단 먼저 다니던 회사 분위기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제가 성장하는 데 적합한 것 같지 않았어요. 오너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저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죠. 각자가 잘 할 수 있는 게 다른데 굳이 그 환경에 저를 맞춰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어요.
6개월 만에 좀 더 체계적인 기획을 하는 내셔널 브랜드로 자리를 옮겼어요. 프랑스 라이선스 브랜드로 매 시즌 테마와 기본적인 컬러, 패턴, 메인 아이템 등 구체적인 사항들을 문서로 프랑스에서 받았어요. 그럼 저는 그 문서들을 토대로 프랑스 디자이너와 논의했죠.
신입 디자이너 시절, ⓒ조인후 '커리어를 끄는 사람들'
“이거는 왜 이렇게 해야 하죠? 이 방식을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관해서 묻고 이해하고 진행하다 보니 저는 정말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체계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었어요. 주로 수출하는 회사여서 그런지 애초부터 기획을 다 하고 원단을 짜기 시작했어요. 주문할 원단이 확정되면 색을 정하고 패턴을 짜고 나염도 했어요. 만약에 스웨터라면 실부터 사서 직기에 걸어서 짜기도 했어요. 이렇게 전 과정을 혼자서 모두 해내다 보니 옷의 전체적인 생산 과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죠. 비록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제가 성장하기에는 안성맞춤인 환경이었어요. 낮아진 자존감도 회복할 수 있었고요.
Q. 디자이너로 근무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한번 대형 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하루는 제가 출장을 앞두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하려는데 자재 담당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블라우스를 제작하기 위해 요청하신 자재 모두 정확하죠?”
자재 담당자의 질문에 자신있게 답했죠.
“네, 그럼요. 거기에 적힌 대로만 해주시면 돼요.”
그리고 퇴근했는데 얼마 후 주문한 원단이 입고하여 창고에 확인하러 갔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블라우스를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너무 두꺼운 원단이었어요. 자재 담당자를 찾아갔더니 그새 퇴사해서 물어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심지어 이미 나염까지 마친 상태여서 제작을 안 하더라도 반품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원단의 패턴이 너무 예뻐서 커튼과 같은 인테리어 제품으로 활용하기에 적절했어요. 그런데 원단을 제공한 해외 브랜드와 맺은 계약에 따르면 저희가 원단을 사용할 수 있는 용도가 매우 구체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어요. 계약을 무시하고 해당 원단을 다른 곳에 사용했다가 발각되면 회사에서는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어요. 이런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5년을 기다려야 했어요.
결국 계약을 준수하기로 하고 창고에 저장하기로 했는데 습도가 조절되는 창고가 회사에 없었어요. 그래서 임시창고에 매일 내려가서 원단이 상하거나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말려있는 원단을 풀었다가 다시 감기를 반복했어요. 이런 일이 흔치 않으니 원단을 풀고 감는 롤러와 같은 장비가 없어서 모두 손으로 직접 했어요. 어느 날은 임시창고 관리자가 창고에 들어서는 저를 막더니 말했어요.
“뭐 때문에 매일 창고를 들락거리는지 알겠는데 그렇다고 매일 이렇게 드나들 수 없어요.”
아무래도 제가 매일 같이 찾아와 원단들을 헤집고 다니니 신경이 쓰였을 거예요. 너무 막막해서 울음도 안 나오고 이제 정말 끝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어느 회사가 저의 딱한 사정을 듣고 선뜻 자신의 창고에 보관해준다고 했어요.
‘어떻게든 버티면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구나’
그렇게 겨우 원단을 해결하였더니 지퍼, 단추, 라벨, 폴리백 등의 모든 부자재가 남았어요. 다시 원피스를 만들기에 적절한 원단을 국내에서 수소문하여 찾았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같은 원단으로 유사품이 나올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해당 원단의 전량을 모조리 사들였어요. 그걸로도 마음이 편치 않아 같은 원단을 제작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어요. 아무래도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물건이 다른 곳에서도 팔린다면 고객의 신뢰가 단번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제작한 상품들이 잘 팔렸기에 망정이지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아찔해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경험이 결국 저를 한 단계 성장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Q.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영감은 어디에서 받나요?
당시에는 트렌드를 예상해서 1년에서 1년 반 정도 앞서서 미리 옷을 디자인하고 제작했어요. 그러려면 앞으로 유행될 소재를 미리 인지해야 하는데 그때에는 전 세계적으로 패션 브랜드에 미래의 트렌드를 예측한 정보를 파는 회사가 있었어요. 브랜드 기업들을 대상으로만 판매하는데 당시 우리 기업도 계약을 체결하여 그 두꺼운 책자를 정기적으로 받았어요. 당시가 80년대 말이었는데 1년에 3~4억 정도 되는 비용을 지불했어요.
그렇게 고액을 지불하고 확보한 책자에는 앞으로 예상되는 디자인 트렌드는 물론 디자인 샘플부터 이를 활용한 구체적인 아이디어까지 제시되어 있어요. 단순히 주관적인 감에 의존하여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인 이슈와 변화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논리를 펼쳐 훨씬 설득력이 있었죠. 덕분에 패션 트렌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알게 됐죠. 그런데 정작 다른 분들은 이 비싼 책자에 크게 흥미를 갖지 않았어요. 덕분에 제가 독점하다시피 해당 책자를 끌어안고 살 수 있었는데 그 안에서 사회적인 현상과 유행하는 스타일이 깊은 연관성을 갖고 새로운 복식사를 써 내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Q. 복식사를 언급하셨는데 옷의 기원은 무엇인가요?
복식이란 인체 위에 표현되는 모든 것을 총괄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복은 주로 몸통과 팔다리를 감싸주는 의복을 말하는 것이고 식은 머리에 쓰는 모자나 관, 발에 신는 신이나 허리를 두르는 띠 등 여러 가지 장식을 의미해요.
옷의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어요. 그중 인체장식설은 인간의 장식욕에 기원을 둔 설이에요. 다양한 복식의 기원설 중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인데 자기 몸을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하는 창조적인 표현 충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요.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서 신체장식방법과 미의 기준에는 차이가 있으나, 신체를 장식하고자 하는 욕구는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어요. 현대에 남아 있는 원시 부족을 관찰하면 아직도 신체에 문신이나 피부 채색 그리고 상흔으로 장식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채색은 신체의 자연 피부색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색을 입히는 것이고 상흔은 피부에 상처를 만들고 상처 부위에 남는 흉터로 신체를 장식하는 방법인데 주로 채색을 통한 장식이 어려운 피부색이 짙은 종족에서 주로 사용하죠.
최초의 인류는 아열대 지방에 살았다고 해요. 그래서 추위나 더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옷이 필요하지 않은데 문신은 왜 필요했을까요? 여기에선 자연히 힘센 자는 지배자가 되고 약한 자는 피지배자가 되었을 것이기에 이러한 문신과 상흔은 단순한 장식품의 의미를 넘어 지배자의 지위나 역량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가졌어요. 그리고 이것은 짝짓기로 이어졌어요. 남성들은 문신과 상흔을 통해 자신이 강한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였죠.
동물들을 유심히 보면 수컷들이 더 화려한 경우가 많아요. 수사자의 경우, 서열 싸움에서 1위에 오르면 갈기가 더욱 풍성해져요. 공작새 역시 서열 1위를 차지하게 되면 더욱 화려해지고요. 동물들은 수컷끼리의 종족보존 경쟁에서 이긴 우수한 수컷이 모든 암컷과 교미하는 일부다처제의 번식 본능을 가지고 있어요. 동물의 수컷은 그래서 힘이 없으면 언제라도 쫓겨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죠.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자기 유전자를 더욱 많은 암컷에게 퍼뜨리려고 부단히 노력하죠.
암컷은 대신 가장 우수한 수컷 하나를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왔어요. 암컷이 자식을 가지려면 오랜 임신 기간을 견디고 출산의 고통도 겪어야 하죠. 낳고 나서도 새끼가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뒷바라지해야 해요. 우수한 새끼일수록 제 앞가림을 잘하고 새끼가 우수해야 어미도 편해요. 따라서 암컷은 원초적으로 짝을 고르는 데 신중할 수밖에 없어요. 결과적으로 남성도 여성도 상대방에게 선택받기 위해 치장을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옷이라는 도구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Q. 패션의 유행에 대해 어떻게 보시나요?
제가 연세대 의생활학과에 재학 당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를 올바르게 연결해 주는 것이라 배웠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올바른 이해를 도와 더 나은 삶을 누리는 데 기여하라는 것이었죠. 결국 의상사회심리학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인식하는 것이고, 또 그런 점이 의류와 만나 ‘옷을 입는 행동을 어떻게 바꾸는가’예요. 유행 심리에 대해 배우는 것이죠.
저는 디자인이 멋있다 혹은 화려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업이 만들어낸 환상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잠재적인 구매자에게 너도 이 옷을 입으면 이렇게 멋지고 예뻐질 수 있다고 세뇌를 하는 거죠. 사람들은 그 제품을 구매해서 착용해도 결코 광고 속의 모델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수천 번을 경험하면서도 또 기대하게 되죠.
사실 촬영 현장에 가보면 메이크업을 엄청나게 공들여서 해요. 조명도 철저하게 준비하고요. 그리고 전문 사진작가가 여러 각도에서 찍으며 최적의 구도를 찾고요. 그렇게 몇백 장 찍은 사진 중 가장 잘 나온 사진들을 추려내서 다시 보정하는 과정을 거치죠. 그뿐만 아니라 촬영에 임하는 모델들은 실물로 보면 정말 조각들이죠.
"그런데 사무실에 출근해서 점심때 식당 앞에서 줄 서서 밥 먹기 바쁜 일반인들이 광고에서 모델이 입는 옷을 굳이 입을 필요가 있을까요?"
저도 의상을 디자인하고 제작했지만, 특정 연예인이 입었다는 이유로 완판되는 것은 사실 잘 이해가 안 돼요. 그 옷을 입는다고 저의 인생도 작가님의 인생도 달라지지 않아요.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을 지속하는 데 그 옷들이 필수가 아니라는 거죠.
Q. 그래도 사람들이 유행을 의식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꼭 부정적이라고 볼 순 없지 않나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시대의 영화인데 모차르트의 탁월한 천재성과 그를 질투하는 살리에리라는 사람을 다루죠.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복식이 다 나와요. 거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큰 모자들이에요. 모자를 착용하는 본 용도는 잊고 그저 부를 과시하기 위해 그 크기와 화려함이 점점 더해갔죠. 덕분에 모자는 30kg을 가볍게 넘겼고 사람들이 모자를 착용하다가 목이 부러져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어요.
나폴레옹 3세 부인이자 황후인 외제니 드 몽티조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모로 주목받았어요. 그녀는 27살일 때 18세 연상이자 내연녀는 물론 두 아들이 있는 황제 나폴레옹 3세와 결혼을 하였어요. 그런 그녀가 기존의 왕실의 화려한 드레스 대신 얇고 부드러운 시폰 재질로 여리여리하게 떨어지는 그런 드레스를 선호했어요. 그런데 그런 그녀의 드레스가 유행을 타고 서민들도 그런 드레스를 따라 입게 되었죠. 그런데 난방에 대한 걱정이 없던 왕궁과 달리 서민들의 집은 난방이 잘 안되는 곳이 많았어요. 결국 폐렴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자 해당 드레스의 착용이 금지되었죠.
단순히 유행이라는 이유로 혹은 명품이라는 이유로 옷을 입다 보면 본인의 진면목을 보여줄 기회를 잃게 돼요. 저는 사람마다 추구하는 이상이 있고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이길 원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조금 더 자신을 드러내고 알리는 쪽으로 가는 게 더 합리적인 진정한 스타일링이라고 생각해요. 옷이라는 제품이 아닌 옷을 입는 사람에게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말이죠.
Q. 결혼 후 퇴사와 함께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다시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쉴 새 없이 달려왔기에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었어요. 되려 아이들이 엄마를 필요로 하는 시기에 옆에 있어 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의미가 있었어요. 출산 후 복귀하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받았지만, 업무량도 많고 출장도 잦은데 두 가지 다 잘할 것 같지 않아서 포기했어요. 직업으로서 디자이너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던 것 같아요.
육아를 시작으로 오랫동안 기회를 보고 있다가 작은 아이 입시를 마치자 더 이상 학원에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었죠. 그래서 가족들에게 선포했어요.
“이제 내 인생을 되찾겠어!”
ⓒ조인후 '커리어를 끄는 사람들'
그후 경력 단절 여성 대상 기업 교육 강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하였어요. 교육 후 합격하여 기업 문화와 커뮤니케이션 강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패션 디자이너였던 경력이 차별화 포인트가 돼 특히 패션, 스타일에 특화된 기업 문화 강의 경력을 쌓을 수 있었어요. 당시는 수평적 기업 문화가 대세로 떠오르며 비즈니스 캐주얼로 복장 규정이 변화하던 시점이라 강의 수요가 많았죠.
Q. 스타일 컨설팅을 시작하신 이유가 있나요?
나름 찾아주는 고객들이 많은 강사였지만 스타일 컨설팅이란 새로운 일을 시작했어요. 경력 단절 10년만, 52세 때였죠. 아무래도 저는 저다운 길을 가고 싶었어요. 직장생활을 하며 깨달았던 패션 산업과 정보의 비대칭 문제는 제가 스타일 컨설턴트로서, 사람들에게 단순히 예쁜 옷과 메이크업을 제안하는 것이 아닌 사람 그 자체의 메시지와 스토리를 드러낼 수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보다 본질적인 ‘스타일 컨설팅’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7ways 퍼스널컬러진단
많은 분들이 패션이나 메이크업 산업의 무지막지하게 뿜어대는 광고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특히 자신에 대해 깊이 있는 탐색을 해본 적이 없는 소비자들은 쉽게 영향을 받아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어떻게 보완할지 끊임없이 요구받죠. 하지만 스타일링의 근본은 ‘표현’이에요. 자신이 아는 것은 단점밖에 없는데 자신을 표현하자니 어려울 수밖에 없죠. 그래서 남들이 하는 대로 입다 보니 어색한 옷이 되고 또다시 옷을 사게 되는 거죠.
최근에 저를 찾아온 분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어떤 일을 할 때 기쁘세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한 탓인지 한동안 답을 망설이더니 그가 입을 열었어요.
“생각해보니 열정을 갖고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어요. 남이 시킨 것 혹은 주어진 것을 했지. 제가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서 해본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이 자신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툴들을 활용하여 같이 장점을 발견해나갔죠. 그랬더니 갑자기 그분이 우시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장점이 많은 사람인지는 몰랐어요.”
사람들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충분히 좋은 것들을 갖고 있는데 남들의 기준에 맞추려다 보니 한두 가지 부족한 것에 너무 초점을 맞춰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삶이 지속될수록 삶은 절대 행복하지 않죠. 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만 잘 인지하지 못하는 장점들을 찾아주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스타일 컨설팅’이라는 일이 너무 보람되고 즐거워요.
Q. 직접 개발한 7ways 퍼스널 컬러 진단 방법은 무엇인가요?
시중의 퍼스널 컬러 진단은 메이크업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피부색과 색소 구성이 중요하죠. 이 진단의 결론은 어떤 제품을 사야 할 것인가예요. 그래서 자신이 추천하는 제품으로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설득하죠.
“립스틱 색을 바꾼다고 해서 사람의 자존감이 높아질까요?”
일시적으로 자신감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자존감이 높아지지는 않아요. 세상은 자꾸 저희가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삶의 모든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 저희 자신을 찾는 게 우선이에요. 쇼핑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을 문제이죠.
'올리뷰쇼', Ⓒ더봄(the bom)
반면에 7ways 퍼스널컬러진단은 스타일링에 초점을 맞춰요. 내면적 특징을 컬러에서 표현하려면 톤(tone)을 활용해야 메시지를 만들 수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톤은 따뜻한 톤 혹은 차가운 톤이 아니라 비비드, 라이트, 다크 등 명도와 채도로 구성된 것을 의미해요.
톤이 중요한 이유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를 표현하는 메세지를 퍼스널컬러진단으로 찾아내는 것이죠. 그 원리는 컬러마다 다른 파장이 얼굴에 조명효과를 내는데 몸에서 나온 맥박파동이 이를 간섭하며 사람마다 다른 조화를 보이는 것이죠. 심장이 뛰면서 혈류를 보내는데 그때마다 맥박이 달라져요. 연령에 따라 맥박에 차이가 있지만 건강 상태, 심리적, 정서적인 부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해요. 이러한 환경을 고려하여 건강미가 잘 드러나도록 돕는 명도, 채도 (톤) 수준을 찾는 데 드레이프(drape) 테스트를 활용해요. 드레이프는 살짝 도톰하고 광택이 없는 단색의 천이죠. 흰 천을 덧대고 드레이프를 올려서 가장 안색이 좋아지고 잘 어우러지는 색을 찾아요.
Ⓒ7ways 퍼스널컬러진단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컬러가 밝으면 훨씬 더 부드럽고 개방적이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에 적극적일 거라고 기대하죠. 어두운색은 고등학교 때 교복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거예요. 어딘지 모르게 통제받는 느낌을 받죠. 옷의 질감은 시각적으로 확인하기 어렵지만 컬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구분할 수 있어요. 상담을 받는 분들에게 잘 맞는 명도와 채도를 알려드리는데 신기하게도 이 톤이 잘 맞을수록 그 톤이 가진 메시지와 그 사람의 성향이 거의 일치해요.
흥미로운 점은 젊고 예쁘고 건강한 분일수록 어느 하나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자신에게 덜 어울리는 컬러도 본인의 건강한 에너지로 극복해 버리는 거예요. ‘어리면 뭘 해도 예쁘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신과 덜 어울리는 어색함, 그 간극이 그냥 노출되는 것이죠.
Q. 주로 스타일 컨설팅을 의뢰하는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물론 퍼스널 컬러 진단이 유행이라 큰 기대 없이 찾아주시는 분도 계시지만 사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엄밀히 가격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금액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가치를 제공해야 하죠. 그러다 보니 고객 대부분이 상품 서비스 내용을 철저하게 읽고, 후기도 꼼꼼하게 확인하고 오세요. 이렇게 온 분들은 자신의 첫인상, 강점 파악에 큰 관심이 있고 커리어의 발전 또는 퍼스널 브랜딩을 위한 스타일링에 관심이 많으세요.
ⓒ조인후 '커리어를 끄는 사람들'
직업적으로는 금융, 회계, 재무, 인사, 마케팅, 디자인, 의료, 교육, 공공기관 등에 일하는 분이 많고 최근에는 공연예술, 웹툰, 애니메이션, 게임, 스타트업 종사자도 많이 오세요. 그 외 전직 국가대표 운동선수, 카레이서, 배우, 전직 치어리더 등 다양해요.
사실 눈물을 보이는 분들이 참 많아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은 걸 후회하는 경우죠. 하지만 절대 늦지 않았어요. 아이덴티티(정체성) 스타일링이라는 상품 고객 중에 일정 문제로 두 차례에 걸쳐 방문하신 분이 있어요. 이분은 첫 시간을 하고 가신 후 1주일 만에 뵈었는데 못 알아볼 뻔했어요. 표정도 완전히 바뀌고 구부정했던 어깨가 쫙 펴지고 후줄근했던 티셔츠 대신 밝은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오셨는데, 결국 스타일은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Q. 경력단절 및 새로운 도전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사실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우리가 걱정하는 것만큼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아요. 남들이 부장인데 내가 만년 과장인 게 사실 길게 보면 인생에 생각만큼 막대한 영향을 주지 않아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엄마도 아니고 아이들이 꼭 불행해진다는 법도 없어요.
ⓒ조인후 '커리어를 끄는 사람들'
그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는 지속적인 노력이에요. 왜냐면 하기 싫은 거를 계속하는 것은 너무 어렵거든요. 인생은 원래 쉽고 재밌는 일을 먼저 해야 해요. 어려운 걸 찾는 게 꼭 답이 아니에요. 그렇게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나를 조금씩 바꿔 나가면 이전에 어려웠던 일도 조금 더 쉽게 느껴지는 때가 오기 마련이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이밴드 BTS의 소속사 빅히트의 수장 방시혁은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사실 큰 그림을 그리는 야망가도 아니고,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도 아닙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구체적인 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에 따라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꿈 없이 살 겁니다. 알지 못하는 미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시간을 쓸 바에, 지금 주어진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개선해 나가겠습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올해는 그동안 미뤄왔던 책을 출시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계속 쓰고 있는데 스타일링 컨설팅을 한번 하면 진이 빠져서 정리를 못 하고 있어요. 올해는 컨설팅 횟수를 줄여서라도 책을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해요. 이후에는 퍼스널 컬러진단에 관해서만 전자책으로 따로 내볼 생각이에요. 현재 국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방식은 일본에서 들어왔는데 저는 제가 개발한 진단 방식으로 시장의 평가를 받고 싶어요.
ⓒ조인후 '커리어를 끄는 사람들'
그리고 강사 양성과정을 활성화하려고 좀 더 알찬 커리큘럼을 구상 중입니다. 퍼스널 컬러 진단하는 그런 컨설턴트들이 있는데 콘텐츠가 너무 적어서 깊이 있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인문학적으로 파고들면 더욱 풍성한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래서 다양한 니즈를 가진 고객들을 조금 더 다각면에서 접근하여 파악하고 가이드를 해줄 수 있다면 조금 더 개개인에게 최적화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이런 작은 시도들이 모여서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