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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Feb 07. 2023

"집에 가면 너만 한 손주가 있어. 어디서 말대꾸를."

출근길 지하철에서 생긴 일

"버릇없이 어디 어른을 밀치고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출근하는 승객으로 가득 찬 지하철 속 화가 가득 배어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이 고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기죽지 않고 대응사격하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 왜 나는 이 상황에 휘말리게 된 걸까?


십 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경기도에서 여의도로 출근하는 건 고역스러운 일이다.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는데 백화점 세일을 기다리는 인파처럼 사람이 역내에 가득했다. 서울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역시 그곳에 가서 줄을 섰다. 급행 지하철은 양쪽에 한 명씩 줄을 서지 않고 한쪽은 두 명 반대쪽은 한 명 총 세 명이 줄을 섰다. 나는 가장 줄이 짧은 좌측에 섰는데 내 앞에는 밝게 염색을 한 젊은 여성이 섰다. 그리고 그 옆에는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노년의 남성이 지팡이와 함께 섰다. 



잠시 뒤 지하철은 도착했고 좌측의 창 너머로 좌석이 보였다. 스크린 도어가 열리자 문화시민은 질서를 지켜 탑승한다는 기대에 부응하듯 매우 질서정연하게 탑승했다. 그런데 거동이 느린 노년의 남성은 우측에 섰지만 남은 좌석이 더 많은 좌측으로 급하게 몸을 틀었다. 젊은 여성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내어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는 상황을 감수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질러 가려는 노년의 남성과 앞으로 직진하려는 젊은 여성의 경로가 겹쳤다.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그와 그녀 모두 자리를 확보하여 착석할 수 있었다. 나는 비어있는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 문제가 시작되었다.


  

자리에 앉은 남성이 자신과 몸싸움을 한 여성이 불쾌했는지 마스크를 내리더니 소리쳤다.


"줄도 제대로 서지 않고 사람을 그렇게 밀면 돼?!"


반대편에 앉아있던 그녀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폰의 노이즈캔슬링이 완벽하지 않았는지 그녀가 답했다.


"세줄서기 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노년의 남성은 이에 지지 않고 오히려 데시벨을 더욱 높였다.


"버릇없이 어디 어른을 밀치고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사실 그의 데시벨이 더 높았지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그녀 역시 극도로 흥분했는지 바로 반격했다.



"마스크나 쓰세요! 마스크 벗고 말씀하지 마시고요!"


대중교통과 의료기관, 감염취약시설 등은 여전히 실내 마스크를 의무 착용해야 한다. 대중교통은 지하철·버스·기차·택시·항공기 등과 통학버스 등이 포함된다. 노년의 남성은 그 말을 듣고 더 흥분하였는지 자신을 지탱하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어느 순간 보행보조기기가 위협적인 흉기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마스크를 쓰든 말던 네 X이 뭔 상관이야?"


남성의 고성과 욕설에 굴하지 않고 그녀 역시 다시 한번 마스크를 쓰라고 남성에게 말했다. 이 과정이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랐지만, 상황은 종잡을 수 없이 격양되었다. 남의 일에 가급적 나서지 말자고 스스로 되뇌었지만 이미 내 몸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였다. 곧 그녀의 어깨 쪽 점퍼를 톡톡 쳐 눈을 맞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정하세요."


아무도 나서지 않던 상황에서 내가 그녀를 진정시키는 것이 고마웠는지 아니면 누군가 나서주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인지 곧 고개를 바로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건너편 남성을 향해 말했다.


"그만 하세요."


순간 지하철에 정적이 흐르고 안내방송이 남성의 고성 대신 공간을 채웠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되나 싶었는데 잠시라도 정적이 자리잡히는 게 싫었는지 남성은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의 데시벨은 더 커졌고 함께 지팡이의 끝 역시 더 높게 올라갔다.


"내가 집에 가면 너만 한 손녀가 있어. 어디서 싸가지 없는 X이 말대꾸를.."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드라마에서나 듣던 상투적인 표현을 근거리에서 육성으로 생생하게 들으니 신기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 겨우 진정을 찾고 있던 그녀가 다시 대응사격을 하려고 했다. 나는 급히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진정제를 주입하듯 가까스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성분 가정에 저분 나이대의 할아버지가 있다면 그녀 또한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본능에 충실하며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이번에는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만하시라고요."


오지랖은 원래 한복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뜻한다. 앞자락이 넓으면 몸이나 다른 옷을 겹으로 감싸게 되는데 '자기 영역을 넘어서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 나는 내 오지랖이 광활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처럼 끝까지 그를 응시하며 내게도 막말을 쏟아주길 기다렸다. 마치 세계대전 때 미국이 참전할 명분을 독일이 만들어 주길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 내게도 나 같은 손주가 있다고 말해봐. 우리 할아버지는 아주 오래전 돌아가셨고 단 한 번도 내게 욕한 적 없다고 말할 테니.'


높아질 대로 높아진 내 전투 의욕이 전해졌는지 남성은 혼잣말로 투덜댈 뿐 더 이상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상황은 일단락이 되었다. 몇 분 후 곧 내릴 역이 다가와서 자리를 일어나려는데 조용히 앉아있던 여성분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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