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번호 적어요. 오늘 일당 송금할 테니."
"집사님, 저 지방에 내려와서 레시피 교육받느라 전화 못 받았어요."
"아니 도대체 뭔 음식이길래 지방까지 내려가서 교육받아요?"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적으로 한 식당이 아니어서 수도권에 지점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 전주 본점에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굳이 홍대예요? 트렌디한 식당들이 많은데 괜찮을까요?"
남 일에 감정이입이 되어 질문이 이어졌다.
"수도권은 처음이니 경쟁이 심하지만 트렌디한 홍대에서 시작하는 게 좋을 거라고 봤어요. 적절한 장소 찾느라 두 달은 소비한 것 같아요."
"홍대에 좋은 자리 많을 텐데 왜 두 달이나 걸려요?"
"매장 앞에 들어가는 입구가 여기 식당의 포인트예요. 구조적으로 그런 입구를 갖춘 곳을 찾다 보니 늦었어요."
"집사님, 내일 식당 오픈인데 준비 다 끝났어요?"
몹시 지치고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끝나긴 뭘 끝나요. 지금 청소해야 하니깐 매장으로 와요."
"정말 제 도움이 필요할 정도예요?"
몇 차례 물었지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올 수 있으면 와서 청소를 도와달라고 했다. 외국에서 경험했던 밑도 끝도 없는 뻔뻔한 요청이었다. 고민 끝에 알았다고 하고 홍대로 찾아갔다. 저녁 시간이었지만 오픈 준비하느라 바빠 밥을 챙겨주지 않을 것 같아 근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고 매장으로 찾아 헤맸다. 홍대거리를 돌고 돌아 겨우 찾았는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봐도 내일 오픈할 식당의 상태가 아니었다. 심지어 식당 입구의 계단은 공사 중이었다.
'15시간 뒤에 식당 첫 오픈하는데 아직 공사를 한다고?'
직원들을 포함해 공사 인부들 역시 몹시 지쳐 보였다. 그중 애써 태연한 척하는 지인이 보였다. 지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공사하는 분이 일손이 필요하다고 한 명만 오라고 했다. 다들 하는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분에게 다가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냐고 물었더니 타일 포장을 뜯고 바로 작업할 수 있도록 한편에 정리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통성명은 생략하고 손발을 맞추어 계단에 얹을 타일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먹고 오길 잘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했던 타일 작업을 마치자, 지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옆에 계신 중년의 남자분을 소개해 주었다.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이라고 했다.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은 처음 보는 나에게 질문을 했다.
"니스칠해 본 적 있어요?"
"아뇨, 없어요."
"그래요? 그럼 오늘 해보면 되겠네요."
복기를 해보니 그건 질문이 아니라 일을 배정하기 위한 포문이었다. 결국 긴 브러시를 들고 목조로 된 바 테이블의 니스칠을 경험이 없는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알려준 대로 상하로 칠하고 최종적으로 나뭇결에 따라 다시 좌우로 칠했다. 이걸 마르는 시간을 고려해 20분 간격으로 3번 하면 된다고 했다. 혹시라도 망쳐서 장사에 지장을 줄까 봐 떨리는 손으로 니스칠을 하며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괜찮아. 내 식당 아니다. 남의 일이다. 남의 일터다. 남의 꿈이다.'
그렇게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니 한결 더 가벼운 마음으로 붓칠을 할 수 있었다. 가벼워진 붓칠은 결국 목조 테이블을 이탈하며 벽면에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아무도 모를 거라며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붓질을 이어가는데 인테리어 사장님에게 발각이 되었다.
"아, 이러시면 곤란한데."
순간 나는 고용계약서도 서명하지 않은 이곳에서 장갑도 끼지 않고 마스크도 쓰지 않고 먼지를 마시고 니스를 흡입하며 인테리어 사장님의 눈치를 보며 왜 니스칠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핑계로 집에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벽면에 브러시로 한 번 더 칠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벽도 전부 칠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살짝 칠해진 니스의 흔적이 보기 싫어서 전부를 칠하자고 한 걸까 아니면 벽면에 니스칠이 생각보다 괜찮았던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니스칠이 끝나고 식당 주변을 청소하고 있는데 지인이 주문한 저녁 식사가 양이 부족해 곤란해했다. 이때다 싶었다.
"저는 아까 미리 먹어서 식사는 안 해도 돼요. 그럼 바쁜 일은 끝난 것 같으니 이제 집에 가볼게요."
지인은 순종적인 일손이 하나 주는 게 아쉬웠는지 식사를 거듭 권유했다. 하지만 식사하고 또 새로운 일이 늘어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문을 나서려는 데 뒤에서 인테리어 업체 사장님이 크게 말했다.
"계좌번호 적고 가요. 일당 보내드릴 테니."
잠시 고민했지만 애써 돈이 궁하지 않은 척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지인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고맙다며 선물을 보내왔다. 며칠 후 사과 상자가 집에 도착했고 나는 감사한 마음에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과 왔어요. 그런데 박스 안에 정말 사과만 있던데요? 박스 전부 해체해 봤는데 지폐를 못 찾겠어요."
지인이 한참 웃더니 말했다.
"그날 진짜 와줄지 몰랐어요. 우리 이제 정말 친한 사이가 되었네요. 서로 힘들 때 도와주고 걱정해 주는!"
사교성이라면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나지만 지인의 뻔뻔함이 강화된 친화력 앞에서는 아직 사춘기 소년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내 손을 조금 보탰다고 그 식당에 애착이 생겼는지 방문객 리뷰가 궁금해 찾아보기도 했다. 다행히 사진을 보니 다들 만족하는 높은 것 같았다.
그래도 궁금증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이면 종종 지인에게 전화해서 묻곤 한다.
"오늘은 손님 많았어요? 다들 맛있다고 하죠?"
아무래도 이제 곧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또래인 지인이 대기업을 나와 자영업을 하니 심히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세상에 자신만의 가게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모든 사장님을 존경하고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들 노력한 만큼 행복하게 오래오래 운영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