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무더위가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금요일 오후, 나는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회의실에서 팀원들과 함께 신사업 마케팅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차갑게 내 등줄기를 타고 흐를 때, 갑자기 대표이사의 호출이 걸려왔다. 휴대폰 진동음에 놀라 커피를 쏟을 뻔했다. 예고 없는 만남은 대개 불쾌한 경험으로 남았기에, 호기심과 경계심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대표이사의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이전의 불편했던 만남들을 떠올렸다. 문 앞에 서서 깊은 숨을 내쉬고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
대표이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그가 누군가와 격앙된 목소리로 통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짓으로 앉으라고 말하며 얼굴이 붉어진 채 창밖을 바라보며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통화를 끊지 않는 그의 모습에 의아함이 커졌다. 동시에 불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내가 대표인데 네가 해야지!"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손에 쥔 펜을 책상에 내리치며 말했다. 상대방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대표님과 제가 함께 미팅에 다녀왔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CFO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서도 짜증과 피로가 묻어났다.
호기심에 귀를 기울이자 논쟁의 핵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들의 격렬한 다툼의 씨앗은 단순한 회의록 작성 문제였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CFO, 바로 나를 이 회사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한참을 내 앞에서 통화를 한 후 전화를 끊었다. 결국 CFO가 회의록을 작성하기로 했다. 그 순간, 대표이사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형광등 아래서 빛났다.
"둘 중에 누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그의 질문에 실망감이 밀려왔다. 겉으로는 회의록 작성에 관한 논쟁이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는 단순한 업무 분담의 문제가 아닌, CEO의 일방적인 권력 과시와 CFO의 힘겨운 저항이 충돌하는 장면이었다.
회의록이라는 사소한 문제를 빌미로, CEO는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 싶어 했다. 반면 CFO는 이런 부당한 압력에 버거워하면서도, 전문성과 자존심을 쉽게 굽히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CEO의 고압적인 태도에 눌리면서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려는 CFO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한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의미 없는 힘겨루기에 몰두하는 모습에 절망감이 밀려왔다. 나를 이 회사로 이끈 CFO는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억눌려 있었고, 회사를 일궈낸 창업자는 독단적인 리더십으로 조직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 순간 이 회사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졌다. 내 안에서는 분노와 수치심이 뒤엉켰다. 건강한 토론과 협력은 없이 오직 상명하복만을 강요하는 조직 문화 속에서 일해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짓눌렀다.
'과연 이런 일방적인 리더십으로 이 회사가 성장할 수 있을까?' '내 커리어는 이대로 정체되는 걸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후회와 자책감이 밀려왔다. 어쩌면 더 균형 잡힌 리더십이 있는 직장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불편한 권력 관계의 한가운데서 나는 그저 무력한 관찰자일 뿐이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나를 옥죄어 왔고,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이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연구 결과가 뇌리를 스쳤다. 스타트업 CEO의 65%가 권력 남용으로 인한 문제를 겪는다는 것. 특히 '창업자 증후군(Founder's Syndrome)'이라 불리는 현상이 이런 문제의 뿌리가 되곤 한다는 사실이 공명했다. 그 순간, 나는 이 작은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스타트업 생태계의 축소판임을 깨달았다.
실리콘밸리의 한 유명 스타트업 사례를 보면, 창업자 CEO가 모든 의사결정을 독점하려 들면서 경영진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회사의 성장이 정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당시 상황과 매우 유사했다.
시간이 흘러 CFO와 마주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두 분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난 것 같습니다. 제가 걱정되어 회사를 떠나기를 망설이신다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커피숍의 조용한 한켠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해와 공감이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다.
얼마 후, 회사의 균형을 지탱하던 마지막 기둥이 무너져내렸다. 창백한 얼굴로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CFO의 뒷모습은 거센 폭풍 앞의 외로운 나뭇잎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의 굽은 어깨에 얹힌 무게는 단순한 개인의 좌절을 넘어, 곧 다가올 회사의 불안한 미래를 예고하는 듯했다.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 결과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CEO와 CFO 사이의 건강한 긴장 관계가 기업의 생명줄이라던 그 말이 이제야 온몸으로 와닿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견제와 균형의 고리가 끊어진 순간, 회사의 심장박동이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CEO의 독단적인 결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대담한 혁신으로 포장된 그의 행보가 점차 무모함의 본색을 드러냈다. 한때 빛나던 우리 회사의 날개가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매일 아침 출근길,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결국 나도 흔들리는 배에서 내릴 결심을 했다. 사표를 제출하는 순간, 가슴 한편에서 후회와 안도가 교차했다. 한때 꿈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이 공간을 떠나며, 리더십의 무게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한 사람의 판단이 수십, 수백 명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책임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지혜와 용기의 중요성. 이 모든 것들이 내 미래의 나침반이 되었다.
과거의 상처를 거울삼아, 나는 새로운 회사에서 리더십을 맡게 되었을 때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때론 과도해 보일 만큼 신중을 기했다. 매 결정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팀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권력의 균형을 지키려 항상 촉각을 세웠고, 소통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어두었다.
간혹 내 행보가 지나치게 조심스럽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이 나를 더 나은 리더로 다듬어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종종 그날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무너져가는 회사를 바라보며 느꼈던 무력감,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얻은 값진 깨달음들. 이 모든 것이 나를 더 강하고 현명한 리더로 빚어냈음을, 나는 매일 새롭게 깨닫는다.
오늘도 나는 과거의 그림자와 마주하며, 더 나은 내일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그 발걸음에는 두려움 대신 확신이, 망설임 대신 결단이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