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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Jun 01. 2020

"바쁜데 이런 거 할 시간 없어."

신입사원, 거센 저항과 맞닥뜨리다.

2013년 5월 중순, 유럽의 감성이 내 몸과 마음 깊이 진하게 스며들어 검은머리 유로피언이 되었을 때쯤 스위스 본사에서의 교육이 종료되었다. 이제 팀원들과 CFO가 기다리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회사 복귀 후 프로젝트팀과 미팅을 진행하였다. CFO에게 보고하는 부서장들이 하나둘씩 미팅룸으로 모였다. 언제 봐도 참 믿음직스러운 부담스러운 팀원들이다. 본사에서 교육받은 내용과 앞으로의 진행 절차에 대해 설명드렸다. 예상대로 고객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있었다.


"OO 씨 아니 이제 주임인가? 이거를 조금 더 단순화하거나 일부분만 적용할 수 없을까?"

(부장님, 차가 노후되서 도로에 멈췄는데 백미러를 교체한다고 다시 가는 건 아니자나요?)


다른 분이 거들었다.


"OO 주임, 지금 우리 부서 얼마나 바쁜데 이거까지 할 시간 없어."

(부장님, 시간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작년에도 시간은 부족했고 내년에도 역시 시간은 부족할 거에요.)


또 다른 분이 더했다.


"난 사실 영어로 되어 있는 부분들이 잘 이해가 안가. 우린 빼주면 안 될까?"

(네, 프로젝트에서 빼드리는게 저도 편하지만 그랬다가는 저와 부장님 모두 자리를 뺄 수 있습니다.)


열심히 회의에 참여하는 부장님들


그렇게 팀원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푸념을 늘어났다. 그리고 이에 비례하여 내 인내심도 늘어났다. 다만 이분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난 퇴사할 마음까지 먹었던 막 2년 차가 된 막내 직원이었다. 무지와 무모함을 무기 삼아 어떻게든 미션을 완수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설득의 과정이 고되고 길더라도 결코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부장님들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지금 당장 주어진 부서의 일이 우선인 것도 이해하고요.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부장님들 부서에 추가로 발생하는 업무가 아닌 기존의 업무를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방법론입니다."


"예를 들어, 전 부서가 현금흐름을 개선하기 위해서 모두 각자 해결책을 제시하여야 하는데 혼자 고민하시겠어요? 아니면 이 프로젝트를 활용해서 이를 해결하시겠어요?"


"OO 부장님, 채권 회수 기간 줄이는 방안 고민해보셨어요? 아직 구체적인 답이 없으시면 저와 같이 타 해외법인 사례를 검토해서 적용해보는 것은 어때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저보다 경력과 지식이 저보다 월등히 높으신 분들입니다. 제가 부장님들 하시는 업무에 대해 평가를 하거나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각 부서가 갖고 있는 연간 목표를 도달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해 설명드리고 증명되고 적용 가능한 해외사례들을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한 분 한 분 설득하였다.  나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몇 번의 프로젝트 미팅과 개별 미팅 이후 프로젝트 팀원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물론 그들이 한 발자국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 나는 열 발자국 백 발자국 이상 더 나아가야 했다. 본사 교육에서도 강요가 아닌 설득이 장기적으로 더 주효하다고 배웠다.


그렇게 팀원들과 거리를 좁히고 눈높이를 맞춰가고 있을 때 이제는 낯설지 않은 발신번호에서 전화가 왔다.


"내 방으로."


수화기를 내리고 정적이 흐르는 긴 복도를 지나 외국인 임원의 방에 입성했다. 같은 건물 같은 층인데 이 방의 공기는 뭔가 다르다. 그의 책상 밑 카펫은 모두 숨이 죽고 꺼져있다. 그곳만 보면 카펫이 아닌 타일이 깔려있다고 충분히 착각할 정도였다. 부장님들 말에 의하면 그가 장시간 책상에 앉아 급한 성격 때문인지 다리를 계속 떨어서 그렇다고 한다. 역시나 내가 자리에 앉아마자 한국인보다 더 성질 급한 CFO가 묻는다.


"본사 교육은 잘 다녀왔지? 어땠어?"


"잘 다녀왔어. 근데 내가 제일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짧던데. 나 담당자로 뽑은 거 그냥 욱해서 그런 거 아니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한 거지? (라고 육하원칙에 의거하여 영어로 정중하게 물었다)"


"저번 프로젝트도 잘했으니 이번 프로젝트도 충분히 잘할 거야. 진행하면서 내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말해줘. 이제 그만 나가줄래? (라고 육하원칙에 의거하지 않고 영어로 편하게 말했다)"


며칠 후 우리는 정식 프로젝트 킥오프 행사를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CFO와 부서장들 그리고 부서원들까지 모두 초대하였다. 대부분의 사원, 대리, 과장들은 부서장들로부터 전달을 잘못 받은 건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프로젝트의 목적과 이점에 대해 설명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역시 대한민국의 질의응답 시간은 아침고요수목원의 아침보다 고요하다. '일정보다 빨리 끝나겠는데?'라고 생각하고 상황 종료를 하려고 할 때 한 분이 물었다.


설명과 설득의 무한반복


"그런데 이거 하면 업무효율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결국 직원들 줄이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오, 다행히 본사에서 준 매뉴얼에 나온 질문이 나왔다. 매뉴얼대로 모범답안을 제시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직원분들이 비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파레토의 법칙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업무처리 방식에 집중하여 업무효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비효율을 걷어내고 추가로 확보한 시간은 여러분의 창의성을 끌어내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도입하는데 쓰이게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했으면 모범답안인데 나도 모르게 더 나아갔다.


'대리님, 그렇게 회사에서 비용절감 그리고 인력 축소가 중요했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저 같은 사원을 굳이 비즈니스석에 태워서 본사에 보내지는 않았겠죠?'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나와 그런 나를 보는 CFO


이후 일각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며 경직된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질문이 물꼬를 트니 두 번째 질문은 지체 없이 바로 나왔다.


"현재 회사 사정이 어려운 것으로 아는데 이런 프로젝트가 중요한가요?"


그렇다. 당시 회사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았다. 한 때 시장점유율 40%가 넘었지만 10년 새 10% 이하로 추락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리해고 및 국내법인 철수와 같은 루머들이 임직원들을 더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회사가 어렵다고 저희가 모두 걱정만 하고 새로운 시도를 모두 미룬다면 오히려 회사의 미래는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준비한 영상이 있는데 잠시 보시고 다시 얘기 나누시죠."


본사에서 제공한 매뉴얼 중 예상 질문 목록에 있던 질문이었지만 답은 직접 제시하기로 했다. 그렇게 준비한 것이 내가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영상이었다. 이 영상은 예비장모님과 2주 전 나눈 대화에서 기인했다.


"오늘 김포에 있는 부동산 사무실 다녀왔는데 너희 회사 커피머신이 차에 장착되어 있더라. 차로 움직이면서 차 안에서 커피 내려서 마셨어."


"어머니,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그건 가정용인데. 사무실에서 내린 커피를 차에서 드셨겠죠."


"아니라니깐!~"


(더 얘기했다간 당시 여자친구의 귀가시간이 볼모로 잡힐 것 같아 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여자친구 어머니와 대화는 끝났다. 하지만 가슴 한편엔 그게 정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증이 질병이라면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은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여자친구 어머니로부터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을 다.


"네, OO 부동산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의 제작진이 아닌) 식료품 회사인데 선생님 차에 커피머신이 장착되어 있다고 해서 보고 싶은데 방문해도 될까요?"


"그러세요(쏘 쿨~)"


이튿날 부동산 사장님이 기다리는 김포로 향했다. 마침 계약을 성사시켰는지 밝은 얼굴로 사장님은 맞아주셨다.

 

"사장님, 유선으로 말씀드렸던 물건 좀 보러 왔습니다."


"하.. 이거 아무나 보여주는 거 아닌데.. 일단 차로 갑시다."


그렇게 우리는 모종의 거래를 하는 것 마냥 조용히 그의 차로 자리를 옮겼다.


"이거예요. 내가 이거 차에 직접 설치했어요! 내가 이거 설치하려고 차 트렁크에 추가로 배터리도 자비로 설비했어요!"


차량 내부에 설치된 커피머신과 한 장 찍어주신 부동산 사장님


"사장님, 대단하시네요!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정말 차의 트렁크에는 추가로 설비한 배터리가 있었다. (그냥 커피숍에서 사 먹는 게 더 저렴할 수도..)


"이게 순간적인 배터리 소모가 커서 커피 내릴 때 에어컨이 작동안하는 거 빼곤 다 좋아요."


커피머신을 위해 부동사 사장님이 직접 설치한 추가 배터리


(어.. 그걸 빼기엔 타격이 좀 큰 거 같은데..)


"사장님, 그런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먹고 싶으면 어떡해요?"


"간단해요. 아이스를 편의점에서 사. 커피를 내려. 내린 커피에 아이스를 넣어. 그럼 아이스 아메리카노."


차량에 커피 컵도 준비해놓고 움직이는 커피샾이 따로 없었다. (좋아, 이거다. 이 분 정도의 열정과 애정이면 다 설득되겠어!)


그렇게 난 카메라에 그분의 커피머신에 대한 애정 및 장착하게 된 계기를 담았다. 집에서 직접 편집하고 국영문 자막까지 붙였다. 그렇다. 누가 봐도 난 그냥 선을 넘고 넘어 지구 밖으로 나가버린 사원이었다.


킥오프 행사 중 영상을 시연하는 중


프로젝트 킥오프 행사에 온 직원들을 대상으로 해당 영상을 틀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어머. 저거 진짜야?"


"커피머신을 차에 설치하는 게 가능해?"


"저 아저씨 되게 웃긴다. 에어컨 끄고 커피 내리는 거 대박인데."


그렇게 짧은 영상은 끝이 났다. 이제 마지막 필살기를 시전 할 차례이다.


"동료 직원분들 보셨죠? 이렇게 저희 회사 브랜드를 사랑하고 애용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사와 우리 브랜드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회사는 이런 고객들이 있는 이상 계속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이번 프로젝트로 회사가 체질을 개선하고 앞으로 더 많은 혁신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잡스처럼 되고 싶었던 나는 제스쳐라도 잡스처럼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사원이 거의 대선 출마하는 것 마냥 출사표를 던졌으니. 하지만 놀랍게도 그 후 그 누구도 불평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나의 설득력은 둘째치고 렇게까지 하는 신입사원이 없었다고 한다. 패기와 열정밖에 없는 신입사원이 장기적 침체로 가라앉은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OO 씨, 이번 프로젝트 왠지 잘 될 것 같아. 열정이 대단해! 신입사원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이제 주임입니다. (이참에 부장님도 대리라고 불러드릴까요?)"


그렇게 주임으로 업그레이드된 신입사원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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