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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Aug 22. 2020

"방콕으로 와줄 수 있니?"

신입사원, 방콕을 가다.

2013년 9월, 느지막한 오후 졸음이 쏟아질 즈음 사무실 전화벨이 울린다.


"네, 재경팀의 OOO입니다."


"음.. 야.. @#$% 놰가.. 너네 회사.. 음.. @#$% 인수하러고 @#$ 월마냐?"


 또한 외국에서 생활했지만 외국인도 구사하지 않는 흔하지 않은 한국어 억양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지로3가역의 노가리와 맥주 세트보다 진한 알코올 냄새가 전해졌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데 이 분은 이미 알코올에 온 몸을 적신 듯했다. 다행히 월 회계마감 기간이 아니어서 그분의 요구사항에 친절하게 응대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선생님, 저희 회사를 인수하신다고요. 대단한 결정 하셨네요. 그런데 어쩌죠? 저희는 작은 해외법인이라 저희 쪽에서 선생님의 요구사항에 답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담당자가 없어요. 아무래도 유럽에 있는 본사와 논의를 하셔야 할 듯해요. 선생님, 영어는 구사하시는데 크게 어려움 없으시죠?"


".. 으음?.."


"네, 그럼 본사 연락처는 홈페이지에 있으니 본사 담당자와 잘 논의하셔서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자 주위에서 귀를 쫑긋 기울이고 듣던 동료들이 모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네, 전화 주신 분이 저희 회사 인수하고 싶다고 하셔서 본사 안내드렸어요."


그리고 조금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자금을 준비하고 영어실력도 키워서 내게 전화를 할리는 없는데?'

전화를 받자 상대편이 먼저 인사를 건네 온다. 그것도 영어로.



"Hi."


예상치 못한 영어 인사에 순간 당황한 나는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는데 전화번호가 무척 길었다. 그리고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야. 데니스."


전화의 주인공은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담당자 데니스였다.


"데니스, 잘 지냈어? 그런데 웬일로 이메일 대신 전화를 준거야?"


"지금 공항으로 이동 중이라 이메일보다 전화가 빠를 것 같아서 전화했어."


이전에 데니스가 일 년 중 해외에 있거나 비행기에 몸을 싣고 다른 나라로 이동 중인 경우가 80% 이상을 차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심지어 집에 도착해서 미리 짐을 정리해둔 리어로 교체만 하고 바로 당일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실은 적도 있다고 했다.


"데니스, 그래. 나한테 해줄 말이 뭐니?"


"너도 알겠지만 최근 한국법인이 프로젝트 진행률이 가장 우수해서 다음 교육 때 진행상황을 공유해주었으면 해."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 근데 어디서?"


"방콕. 그럼 잘 준비해서 11월에 방콕에서 보자."


suzukii xingfu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그렇게 타 해외법인들 앞에서 발표까지 포함된 내 생애 첫 동남아 출장이 결정되었다. 무엇을 발표할 것인가 보다 스위스 본사 출장에서 봤었던 해외법인 동료들을 볼 생각에 무척 들떴다. 이번에도 그들과 교육 중에 열띤 토론도 하고 같이 저녁식사도 같이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익숙한 단축번호가 전화기에 떴다. 발신처는 저 길고 어두운 복도 끝에 있는 임원의 방이다.


그의 방 앞에서 노크를 했다. 그리고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그가 나타나 손바닥을 펴며 손금을 보여준다. 금의 운명선을 보아하니 경쟁심이 강하고 승부욕이 강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 덤벼드는 용맹함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손금을 보여주는 것치곤 다소 공격적인 팔의 각도가 혼란을 야기했다.


fotografierende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영화 '아이언맨'의 주인공이 손을 뻗어 리펄서건(황색의 빔)을 쏘기 위한 자세와 흡사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가 아이언맨의 동작을 굳이 내게 시연 할 이유는 없었다.


'설마 나와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건 아니겠지?'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 하는 첫 하이파이브의 상대가 외국인 임원이라니 생각지 못한 전개다. 손을 뻗어 그의 손바닥을 치려는 순간 그의 손바닥이 친근함의 표현인 하이파이브가 아닌 '잠시만 그 자리에 멈춰'일 수 있겠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내 활짝 핀 손바닥은 자연스럽게 방 한가운데 공기를 가르고 수줍게 내 옆에 착지했다.


'잘했어. 자연스러웠어. 절대 모를 거야.'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들었어. 방콕으로 출장 간다고? 거기에서 프로젝트 진행상황 발표도 한다며?"


"맞아, 그래서.."


"내가 도와줄 게 있니? 뭐 알아서 잘하겠지. 그럼 잘하고 와."


"어, 그럴게."


잠깐, 물었으면 답을 들어야지. 도대체 대답을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수사 의문문(rhetorical question) 실제상황에서 쓰였다면 이런 것일까?'


일반적으로 질문은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이 크지만 수사 의문문은 말하는 사람이 이미 답을 알고서도 질문하는 경우로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대신 평서문을 나타냈을 때 얻을 수 없는 '강조'효과가 있다. 하지만 사용되는 경우와 사용자에 따라 '강조'가 아닌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Rebrand Cities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그래,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모두 같을 순 없으니.'


어찌 됐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력이 짧은 내게 타 해외법인들의 가장 똑똑한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사람이었기에 그의 그런 무뚝뚝함과 종종 에티켓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함도 충분히 포용할 수 있었다.


몇 주 후, 나는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 5 시간의 비행 후 태국의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완나품은 태국어황금 들녘이란 뜻이다.


수완나품 공항; 출처: aeronautics


2005년 말에 문을 열 예정이었으나 일련의 예산 초과, 건설 결함, 부패 의혹 등으로 인해 지연되었는데 공항이 오래된 묘지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건설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유령을 보았다고 주장해 결국 2005년 9월 태국 공항공사는 99명의 승려들이 정령을 달래기 위해 구호를 외치는 의식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나는 공항에서 유령도 승려도 보지 못했다.


유령이 사라진 공항을 나와 숙소에 도착하니 드디어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5개월 전 스위스에서 보고 두 번째 만나는 자리였지만 마치 명절 때 사촌들을 본 것 마냥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인도와 이스라엘에서 온 담당자들


그들에 비해 내가 경력도 짧고 나이도 가장 어렸지만 언제나 동등한 동료이자 선의의 경쟁자로 대해줬다. 물론,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진행률이 압도적이어서 그럴 수 있지만 매일 같이 교육을 받고 식사도 같이 하다 보니 출신 국가와 성별 그리고 나이를 초월하여 동기처럼 끈끈함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런 동료들을 만나 같이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전 출장에서는 오늘을 기약하고 각자의 국가로 돌아갔지만 이번 일정이 끝나면 무엇을 약속할 수 있을까? 이번 출장이 더욱 특별하고 즐겁고 생산적이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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