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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Feb 02. 2021

"떼인 돈 제가 한번 받아보겠습니다."

신입사원, 떼인 돈 받는 해결사로 등판하다.

나의 비밀 아닌 비밀을 한 가지 공개한다. 최근 몇 년간 마케팅과 신사업 기획을 주로 했는데 주위의 지인들은 내가 천상 마케터인 줄 알고 있다. 사실 난 마케팅을 하기 전 재경부서에서 회계원장을 담당했었다. 상경계를 나와서 주위의 친구들이 대부분 금융업으로 갔지만 금융업에 큰 꿈이 없던 나는 다양한 외국계에서 인턴했던 경험을 토대로 세계에서 가장 큰 식품회사에 입사했다. 애초에 마케팅을 지원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지원 접수일이 되어서야 서류 접수만 가능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국, 그 후 열린 자리가 회계팀이었고 큰 고민 없이 지원하였는데 당시에는 그 결정이 어떠한 파장을 가져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Kat Jayne 님의 사진, 출처: Pexels


회계 업무는 무한반복의 연속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업무가 월말이면 대차대조표 계정과목들의 변동금액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이상하게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미루고 싶은 업무였다. 많은 회계 계정과목들 중 유독 변동폭이 커 계정조정하는데 오래 걸리는 계정과목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미수금 계정과목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변동이 많은 미수금 계정과목 내 유독 변동이 없는 금액이 있었다. 사수에게 묻자 타 외국계 회사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정산이 덜 된 금액인데 당시 합작법인이 국내에서 실체가 없어져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다. 그래서 부장님은 해당 금액이 채권 회수가 불가하다고 판단하여 장부에 대손으로 인식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못 받은 돈 = 똥 밟았다" 생각하고 그냥 포기하려고 했다.


"이제 충분히 기다렸으니 그만 포기하고 정리하자."


부장님이 말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모두가 침묵으로 암묵적 동의를 표는데 헬륨으로 부푼 풍선이 하늘로 솟구치듯 내 손이 올라갔다.


"그래, OO씨, 다른 생각이 있어?"


입이 방정이라고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왔다.


"그 돈 제가 한번 받아보겠습니다."


익숙한 정적이 흘렀다. 차변과 대변을 혼동해 반대로 기입하여 보고드렸을 때와 비슷한 당혹스러움이 사무실 공기에 깊게 베어졌다. 잠시 후 침묵을 깨는 부장님의 짧은 답이 들렸다.


"그래, 한번 해봐."


마치 대통령을 장래희망이라고 적은 아이를 마지못해 격려하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료들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어떤 동료는 몇 년째 못 받고 있는 건인데 회계팀이 채권추심부서도 아니니 너무 애쓰지 말라고 우려 섞인 위로를 건넸다.


Image by TeeFarm from Pixabay


그런데 주위분들이 나에 대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생각보다 엄청 집요하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합작법인을 세웠던 상대방 외국계 회사를 알아봤다. 그곳은 어느 마트를 가던 선반에 고정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명한 외국계 소비재 회사였다. 내가 좋아하는 제품을 보유하지 않아서일까 거대한 규모는 내게 딱히 위화감을 주지 않았다. 담당자 전화번호 찾을 수 없어 우선 기업의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 끝에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직원과 통화할 수 있었다.


Phone; 출처: Pexels


"안녕하세요. OOO 재경팀의 OOO입니다. 이전 당사와 합작회사 OOOO 설립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정산되지 않은 건이 있는데 혹시 담당하는 분이신가요?"


"네?"


왜 우리는 상대방의 요청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네?'라고 답을 하는 걸까? 어쨌든 수화기 건너편의 그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대서사시와 같은 미수금의 역사를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의 답이 들렸다.


"죄송합니다. 저희 법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부분이어서 해당 부분은 진행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해외 본사에 직접 물어도 되는 거죠?"


"네? 뭐 그렇게 하셔도 되지만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판단은 내가 한다. 그대는 질문에 답만 해.)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이렇게 채권회수를 위해 나의 역할은 바다를 넘고 국경을 넘어 무한확장되었다. 수화기를 내리고 당장 그 회사의 본사 홈페이지와 각종 기사부터 뒤졌다. 가까스로 대표 변호를 찾아 전화기 다이얼을 누르려던차 유럽과 한국의 시차가 9시간 가까이 차이나는 것을 확인하였다. 결국 증빙도 남길 생각으로 이메일로 대신하기로 했다. 이렇게 혼자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통화하고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외국인한테 이메일을 쓰는 내 모습을 주위에선 신기해했다. 그래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돈을 꼭 받아내어 미수금 계정에서 털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더 컸기 때문이다.


Andrea Piacquadio 님의 사진, 출처: Pexels


며칠 후, 이메일을 보냈던 거래처 해외 본사에서 회신이 왔다. 물론 영어로.


"지급 요청사항은 함께 보내준 증빙과 확인하였습니다. 다만, 지급 가능한 거래처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 지급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의 답장에서 고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곧 회신에 대한 감사와 함께 짧은 문장을 적어 보냈다.


"그럼 해당 건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을 알려주세요."


어처구니가 없는 요청이라고 생각을 한 건지 이후 회신이 없었다.


'흠. 이런게 유럽의 여유이자 낭만인가?'


slon_dot_pics 님의 사진, 출처: Pexels


하지만 유년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고 대한민국 육군을 제대하고 신혼여행을 동남아로 갈 예정이었던 내게 유럽의 여유와 낭만은 전혀 감흥이 없었다. 본사 홈페이지를 뒤져서 침묵을 지킨 담당자의 상사 연락처를 찾아냈다. 그리고 다시 키보드워리어로 분하여 나의 최종병기 키보드 위에 손가락차례대로 안착시켰다.


"안녕하세요. OOO의 OOO입니다. 미수금 관련하여 귀사의 담당자 OOO와 논의하였는데 회신이 없어서 문의드립니다. 해당 건이 신속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조치 부탁드립니다."


친절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이 분 또한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고 나는 먹이사슬의 다음 층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풍속이 아름답고 예절이 바른 동방예의지국의 구성원답게 회신이 없을 경우 취하게 되는 조치에 대해서도 미리 설명했다.


"바쁘신 업무로 인하여 회신이 불가한 경우, 당신의 상사와 해당 건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점점 이메일 수신자의 직책은 올라가면서 회신의 속도는 빨라졌다. 높은 자리일수록 워라벨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일의 처리가 빨라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도달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먹이사슬의 끝에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CFO(최고재무책임자)에 다다르자 이제껏 받은 회신 중 가장 생산적인 회신을 받았다.


출처: Pixabay


"요청하신 해당 미지급금에 대해서 확인하였습니다. 지급을 진행하고자 하는데 귀사가 저희 거래처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 당사 시스템을 통한 지급이 어렵습니다."


나 또한 회사에서 지급을 진행한 적이 있기에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기업에서 불명확한 자금집행을 막기 위해 기존의 등록된 거래처로만 정산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물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회신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사 또한 거래처로 등록되지 않은 거래처에 대한 1회성 지급은 시스템 등록보다는 매뉴얼 입력을 통한 지급을 하고 있습니다. 귀사 역시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유사한 절차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오랜 기간 정산이 지연된 만큼 빠른 시일 내 해결될 수 있도록 협조 요청드립니다."


출처: Pixabay


몇 번의 전화와 이메일을 보낸 후 드디어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것 같다. 이 기세를 이어 지급을 확정 지을 필요가 있었다. 이후 매일같이 메일을 보내며 진행상황을 살폈다. 야생에서 뱀이 기다랗고 유연한 몸으로 먹잇감의 감고 혈관을 조이듯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여갔다. 지구 반대편 상대방도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 식품회사가 몇 백만 원 밖에 안 되는 미수금으로 이렇게 숨 막히게 압박할 줄 누가 예상했을까?


며칠 후 출근하여 아웃룩을 열었는데 유럽에서 온 이메일이 있었다. 보통은 내가 묻는 것에만 수동적으로 답을 하던 그들이 먼저 이메일을 보낸 것이다. 이메일을 열기 전 온갖 시나리오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설마 돈 받고 싶으면 유럽으로 넘어와서 현금으로 가져가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비행기 왕복표가 더 비쌀 텐데..'


'매월 1유로씩 100년 동안 상환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말투는 친절하지만 내용은 불편한 이메일로 매일 압박했다고 업무방해죄로 고소당하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한 멘탈을 부여잡고 용기를 내어 이메일을 열었다.


Torsten Dettlaff 님의 사진, 출처: Pexels


"회신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청하신 미지급금에 대한 지급을 진행할 수 있게 되어 알려드립니다. 돌아오는 가까운 지급일에 집행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몇 주간 끌어온 일이 드디어 해결이 되었다. 회사로부터 최종 채용 합격 통보를 받을 때보다 더 기쁘고 후련했다. 마치 키 190cm의 서양인을 상대로 작은 동양인이 덩크를 꽂아 넣은 느낌이라고 할까? 조금 더 정확하게는 소개팅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피부트러블로 고민하는 중 가장 큰 여드름을 상처 없이 짜냈다고 하는 것이 당시의 내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이후 부서 주간회의에 가수 엄정화의 어깨뽕 의상에 버금가는 힘을 어깨에 싣고 참여했다. 내 어깨를 보지 못한 건지 부장님의 심드렁한 질문이 이어졌다.


"OO씨, 이제 미수금 건은 그냥 비용 처리하고 정리하면 어떨까?"


"입금될 예정이니 미수금 계정에서 정리는 해야죠."


"잠깐, 입금하기로 했다고? 정말이야? 지난 몇 년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결한 거야?"


"교과서 위주로 충실하게 준비.. 아니 그냥 내 돈이라고 생각하고 임했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게 너무 애쓰지 말라고 했던 동료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나에게로 향했다. 물론 이번에는 측은함이 아닌 경이로움이 가득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부장님은 외국인 상사에게 해당 건에 대해 보고하였다. 어느새 내 어깨에 있던 뽕이 부장님의 어깨로 옮겨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며칠 후 거래처로부터 입금된 외화를 계좌에서 확인하였다. 이렇게 나의 첫 해외 채권추심 프로젝트는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Rebrand Cities 님의 사진, 출처: Pexels


누구나 처음 하는 일은 생소하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몸으로 부딪히고 체득한 경험은 앞으로의 성장에 더할 나위 없는 밑거름이 된다. 개인의 성장은 우연과 행운이 아니라 용기와 끈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전례가 없고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맡게 되더라도 담대하게 성장의 기회로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 결과는 예상외로 긍정적일 수 있다. 등산가들이 활력을 얻기 위해서는 험난하고 높은 산이 필요하고 외과의사가 수술에 전념하는 데는 위급한 상황이 도움이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업무에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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