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퇴사하고 한창 다양한 매체에 열심히 기고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글을 쓰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보면 종종 헤드헌터분들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이직 관련 제안을 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며 불규칙적이지만 나름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어서 재취업이 당시 절실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직접 지원하거나 사내 추천 혹은 합류 제안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제가 사실 재취업을 생각하고 퇴사를 한 것이 아니라서 지원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분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설득을 시도하였다. 어쩌면 변호사이자 컨설턴트로 활동하였지만, 협상 전문가로 더 유명한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저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를 최근 감명 있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기업이 규모는 작지만,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아직 퇴사한 분이 아주 극소수일 정도로 매우 좋은 기회예요."
이쯤 되면 나도 더 명확하게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놈의 호기심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그래요? 궁금하긴 하네요."
오랜 경험을 갖춘 그분은 입질이 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더욱 세차게 대화로 끌어당겼다.
"제가 이 기업에 입사시킨 분들이 몇 있는데 다들 대체로 만족하세요. 지원을 하시면 바로 이쪽 경영진과 미팅을 할 수 있어요."
마치 외부 헤드헌터가 아니라 해당 회사에서 근무하는 리크루터처럼 상당한 확신을 두고 얘기하셨다. 사실 나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사무실의 위치이다. 출퇴근길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게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출퇴근 거리가 길어질수록 신체활동과 심장혈관 적합도(CRF)가 떨어지고, 체질량지수(BMI), 허리둘레, 대사 위험 등 건강지표가 부정적으로 나타난 조사결과를 미국 예방의학저널에서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데 회사 위치가 어디예요?"
이전의 신속한 답변은 온데간데없고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예전에는 사무실 위치가 이직하는 데 큰 역할을 끼쳤는데 이제는 아주 중요하지 않죠. 지금은 재택근무도 많이 하기도 하고 워라밸이 중요한 시기이니깐요. 집이 어디세요? 이 회사 정말 괜찮은데 지원 의사가 있으실까요?"
묻는 말에 답변은 안 하고 되레 선문답을 하는 거 보니 아무래도 내가 이번 건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휘둘리지 않고 다시 묻자 그가 답했다.
"아.. 여기는 판교예요. 별로 안 멀죠? 카카오도 이곳에 본사가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경기도 고양시에 살아서 서울을 가로질러 출퇴근하기에는 무리가 될 것 같아요. 지원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곡한 표현으로 지원 의사가 없음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분 생각보다 끈기가 대단했다.
"그런 부분은 일단 지원하고 면접 후 고민해봐도 되지 않을까요? 일단 서류접수부터 해보죠. 면접 보시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잖아요.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지원해보세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출퇴근 왕복 4시간이 예상되는 직장에 우선 서류부터 넣고 입사 여부는 나중에 고민하라니. 듣는 사람에게 불쾌하거나 직접적인 상황을 표현하지 않고 덜 공격적이고 동의할만한 표현을 사용하는 완곡어법이 이분에게는 일말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진 듯했다.
"제가 이해한 게 맞다면 저는 입사 의향이 없는 기업에 지원서를 일단 접수하고 서류 통과가 돼서 면접이 잡히면 서울을 가로질러 판교까지 면접을 보러 가는 거네요? 보통 면접이 2번 이상 할 텐데 기업이 최대한 지원자를 배려한다는 가정 아래 2번의 면접을 진행하면 왕복 4시간에 인터뷰 시간 1시간을 고려하면 대략 10시간 정도 소요되는 일정이에요?"
전화기 건너편 상대방이 당황한 듯 말이 없자 내가 말했다.
"선생님 보시기에도 단순히 지원하는 게 아니죠? 잠재적인 지원자의 시간도 소중해요."
"그래도.."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2022년 방영되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서울 도심과 멀리 떨어진 경기도의 끝에 살고 있는 세 남매가 답답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길을 찾아 나서는 내용이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그려지며 경기도민들의 극한 공감을 받았다. 시청하면서 감추고 싶었던 심정을 들켜버린 듯 했다. 나 역시 인생의 1/4를 지하철과 버스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