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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Mar 20. 2022

2080년 전 로마의 시저가 탄산수로 목욕을 했다고?

160년의 역사를 가진 페리에의 탄생과 번영


한니발이 마시고 카이사르가 목욕을 했던 천연 탄산수

때는 기원전 218년, 고대 도시 카르타고를 대표하는 장군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한니발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하고 있었다.


”장군, 아직 로마에 도착하려면 갈 길이 먼데 잠시 병사들 목을 축이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니발(Hannibal), ⓒ페리에


그의 군대는 진군 중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베르게즈 지방의 천연 탄산수 온천장인 레부양(Les Bouillens)의 물로 목을 축였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기원전 58년, 역사상 가장 목욕하기를 즐긴 로마인들은 이곳을 차지하자마자 온천으로 만들었다. 당시 로마의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를 비롯한 위정자들은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앞다투어 대중목욕탕을 세웠다.


한니발의 군대가 목을 축이고 로마의 시저가 온천을 즐겼던 이곳이 바로 오늘날 전 세계 150여 개 국가에서 즐겨 마시는 탄산수 '페리에'의 수원지 '베르게즈'이다.


베르게즈의 탄산수가 본격적으로 상품화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였다. 이전에는 병 치료에 특효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병 치유를 기대하는 인근 주민들이 목욕도 하고 탄산수를 마다. 지역의 유지였던 알폰세 가르니에(Alphonse Garnier)는 페리에 수원지뿐만 아니라 부근의 토지를 매입하여 1863년 나폴레옹 3세로부터 이 샘을 상품화할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베르게즈 지역을 온천지대로 개발했다. 온천욕을 즐기는 관광객을 위해 호텔을 짓고 탄산수를 병에 담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1869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사업에 큰 타격을 입었고 회사는 부도가 났다.



페리에 박사의 이름을 딴 페리에의 탄생

1894년 탄산수와 이를 이용한 치료법에 관심이 있던 루이 페리에 (Louis Perrier) 박사는 '베르게즈 건강음료 미네랄워터 회사'를 설립, 베르게즈의 레부양을 인수받았다. 1898년 페리에 박사는 탄산수의 속성을 연구하고 병입하는 기술을 완성하는데 몰두하면서 병에 미네랄과 탄산의 균형을 맞추는 공정과정은 물론 물과 천연 탄산가스를 분리하여 채취하는 방식도 개발했다. 당시 영국에서 온 매우 부유한 영국 신문 거물의 형제인 존 함스워드 경(Sir John Harmsworth)은 베르게즈 근처에서 불어를 공부하던 중이었다. 페리에 박사(Dr. Perrier)로부터 레부양을 소개받았는데 그는 탄산수의 매력에 빠져 구매를 결심하였다. 심지어 구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보유한 영국 신문사의 지분도 팔았다. 하지만 이후 온천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온천은 닫고 탄산수 병입사업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탄산수 공정과정을 개발한 페리에 박사의 이름을 따 브랜드명을 '페리에'로 지었다.


루이 유진 페리에 박사, ⓒ페리에


'페리에'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차별화가 필요했다. 그때 존 함스워드 경의 눈에 교통사고 이후 자신이 재활운동 목적으로 평소 사용하던 인디언 곤봉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페리에의 상징과도 같은 병의 형태는 존 함스워드 경의 인디언 곤봉을 착안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물방울처럼 우아하게 굴곡진 병은 단번에 소비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나중에는 버킹엄 궁전의 공식 음료로 지정받을 정도로 페리에의 인지도와 수요는 급격하게 높아졌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페리에의 상징인 병의 형태와 색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인디안 곤봉(Indian Clubs), ⓒ페리에



격동의 시대와 함께 성장한 페리에

페리에가 160년의 세월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탄산수 내 독보적인 지위와 감각적인 물방울 형태의 병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시대를 앞서가는 관능적이면서도 호기심을 일으키는 특색 있는 브랜딩이었다.


도메르게 ‘페리에걸’, ⓒ페리에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페리에의 이미지는 우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여성들이 마시는 음료로 대중에게 인식이 되었다. 사실 근대화가 먼저 시작된 유럽에서도 여성 가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의무를 다하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여자의 본분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워낙 강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젊은 남들을 모조리 전선으로 보내버렸고 생산 현장은 여성이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정부가 나서서 여성에게 전선으로 떠난 남성의 빈자리를 메우라고 적극 장려하였다.


1927년경 Perrier 병입 공장, ⓒ페리에


군수 공업은 이런 변화가 유독 두드러진 분야였다. 거친 쇠붙이를 다루고 복잡한 기계가 가득 찬 군수공장은 남성의 배타적 영역이었다. 프랑스 한 대형 군수공장에서는 남성 노동자 절반이 징집되어 생산에 차질이 생기자, 부랴부랴 여성을 모집해서 공장을 운영해야 했다. 선임 남성 숙련 노동자들이 여성이 공장에 들어서는 데 반대하였지만, 노동력 부족 사태를 해결할 다른 대안이 없었다. 프랑스 군수공장에 고용된 여성 노동자가 1914년 7월에는 21만 명이었는데, 1918년에는 4배 이상 증가한 91만 명이었다. 덕분에 페리에 역시 발목을 모두 덮는 거추장스러운 긴치마 대신 남성의 전유물과 같던 바지와 주머니 달린 재킷을 입은 여성들을 광고에 내세웠다. 실용성과 편안함을 내세운 복장이었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여성 옷에 달린 주머니와 여성용 바지가 특별할 것이 없지만, 당시엔 달랐다. 세상은 "여성이 바지를 입는다니!"라며 경악을 했다.


브레노트 ‘페리에’ 광고, ⓒ페리에


1933년 존 함스워드 경이 죽고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페리에 사업은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인 레뱅이 페리에 소유권을 넘겨받아 생산 시스템과 기술 개발에 집중한 결과, 1973년 병 제조부터 생수 주입까지의 전 과정을 통합 관리할 수 있는 시설을 완비하였다. 페리에는 미국에 3억 병을 수출하고, "식탁 위의 샴페인"이라 불리며 미국 수입 식용수의 약 80%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운다. 1980년대 후반 페리에는 미국에서 연간 12억 병을 팔며 전 세계 페리에 매출의 1/4을 차지했다. 덕분에 1989년 포춘지가 선정한 가장 경쟁력 있는 6개 회사 중 하나로 페리에가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포춘지는 6개 회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 기업들에게 위기가 닥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미 안정적이면서 엄청난 수준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리에는 시대를 대변하는 여성의 페르소나를 브랜드 정체성에 반영함과 동시에 도발적이면서도 동조할 수 있는 광고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페리에의 브랜드 정체성은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일관성 있게 유지되고 있다. 2011년 페리에는 벌레스크* 스타 디타 본 티즈를 광고모델로 내세우며 페리에와 함께 관능미를 새롭게 해석하였다. 페리에의 제안을 받고 디타 본 티즈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페리에의 신화와도 같은 역사와 프랑스의 낭만과 예술을 담아낸 브랜드를 평소에도 동경해왔어요. 페리에는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이며 제가 열망하는 모든 것의 결정체예요."


디타 본 티즈, ⓒ페리에


*작가의 도움말: 벌레스크는 셰익스피어 등과 같이 선행한 예문 작품을 패러디하는 양식을 말하며 일반적으로는 성적인 웃음코드를 내포하지만 노출을 하지 않는 선에서 여성의 매력을 강조한 춤을 포함한 쇼


페리에는 이후에도 독특하면서도 시선을 끄는 광고 캠페인을 집행하였다. 2019년에 공개한 2분 길이의 광고에는 모나리자가 등장한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나리자 작품에서 나온 모나리자가 파리 시내를 즐겁게 배회하는데 한 손에 페리에를 들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나온 모나리자는 춤이면 춤 그림이면 그림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진정한 만능 인플루언서로 주위 사람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는다. 마치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작품처럼. 16세기에 그려진 그림과 동일하게 현세의 모나리자도 카메라 세례를 받는 것을 보여주며 자칫 시대에 뒤처져 보일 수 있는 브랜드를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광고였다.


페리에 ‘모나리자’ 캠페인, ⓒ페리에


요즘 다양한 탄산수 브랜드들이 페리에의 아성을 무너뜨리고자 소셜미디어 상 바이럴에 최적화된 컬러풀한 디자인으로 많은 호응을 받고 있지만, 아직은 19세기부터 이어온 페리에의 브랜드의 아성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페리에의 지난 캠페인을 보면 '새로운 동시에 일관되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하였다. 브랜드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산을 유지하며 동시에 브랜드에 새로움과 신선함을 주기적으로 입혀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트렌디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였다. 


페리에는 단순한 음료가 아닌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다. 페리에의 고급스러우면서도 청량하고 이국적인 이미지는 1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비 심리와 니즈에 부합한다. 소비자들은 탄산수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병에 담긴 신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심리적·감정적 경험과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페리에가 가진, 그리고 그 안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다. 다음에는 페리에가 겪었던 위기와 반등에 대해 풀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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