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의 글. 기억하고 싶었던 날
만 8년 3개월 만에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았다.
대학 졸업장은 아마도 당분간 내가 산 물건 중 가장 값비싼 것이 될 것 같다. 고생하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운 이야기이기에 아마도 내일이면 나는 이 글을 지울 것 같다..ㅎㅎ
스무살, 3월부터 끊임없이 달려왔다.
신입생 OT를 마치고 술에 거나하게 취해 집에 들어온 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컴컴한 집에 홀로 불 켜진 안방. 어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언제 정지될지 모를 신용카드를 내밀며 '언제 입게될지 모르니 양복 하나 사입어라. 이게 마지막 용돈이다'
고3과 수능을 거치며 집이 휘청거리는 낌새는 채었지만 공부를 핑계로 외면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이었다. 땅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대학 가면 해방이라고, 그렇게 공부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너무나도 해야만 하는, 생존의 무게감이 나를 짓눌러 무너뜨리는 기분이었다.
생물학적으로만 성인이었던 내게 사회적으로도 진정한 어른으로서 자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강요에 가까웠다. 동기부여가 없으니 성적은 개판이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사람의 자존감은 바닥을 기었다. 1학년 때 장학금을 받기 위해 교수님을 면담하는 자리에 전날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늦잠을 자서 늦었다. 이유가 어떻든 공짜는 없는 세상에서 멍청하게 늦잠을 잔게 문제였다. 너같은 학생에게 더이상 기회는 없다며 지도교수님에게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났다. 잔뜩 부은 눈으로 컴컴한 집에 돌아와도 아무도 나를 위로해줄 수 없었다. 염치를 무릅쓰고 지도교수님께 편지를 썼다. 사연없는 고학생이 수두룩하겠지만, 구구절절히 나의 사정을 설명했다. 교수님께 무작정 찾아가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엉엉 울었다. 종이에 잉크가 다 번지도록 지원서를 써서 다음 학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장학금 수혜자는 도서관 봉사를 해야 했는데, 동기들은 나를 보며 '너가 성적이 그렇게 좋았던가?'하고 지나쳤다. 내 뒷통수에 내가 생계 지원 장학금을 받는다고 적혀 있지 않는데, 그 이후로 그 시간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쪽팔렸다.
더 쪽팔리게도 방황의 시간은 꼬리가 길었고 정신을 차릴 즈음 나는 벌써 2학년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군대에 가버렸고 나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입시를 준비하는 남동생과, 이제 막 중학교에 접어든 막내동생이 있었다. 군대를 가면 나는 이 지옥에서 잠시 유예되겠지만 모든 것으로부터 무책임해지는것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했다. 동기들에게 잘나보이고 싶고 으스대고도 싶었다. 2학년 1학기가 끝나고 성적우수를 받은 나를 그 교수님이 다시 불렀다. 4년 장학금 추천서와 함께. 거기에 내 상황(사연)을 설명하고 부모님 동의를 구해야 했다. 당시 우리 집의 사정이 외부에 알려지길 꺼려하셨던 부모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고, 그 때부터 더욱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다. 돈이 있다는 곳에는 앞장서서 달려갔다. 과외를 서너 개씩 뛰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세 끼 한 줄 김밥과 에너지바만 먹고 한 학기를 다니기도 했다. 밤새서 공부하고 시험을 치른 뒤에도 내 방 침대가 아니라 과외 학생의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방학이 되면 더욱 치열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해외여행이나 교환학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ROTC훈련을 마치고 훈련소에서 퇴소한 날부터 군복을 갈아입고 일을 하러 나갔다. 학원 다니는 돈이 아까워서 영어도 취준도 운전면허 따위도 혼자 공부해서 해결했다. 집에 가는 길에 치킨집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냄새만 맡고 포기하고 집에 간 적도 있다.
하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죽어도 내색하기 싫었다. 아마도 대부분은 이런 나를 몰랐을 것이다. 나 스스로 떳떳하고, 평범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더 쉬지 않았다. 단 일주일도 맘편히 쉬었던 기억이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나는 어른보다는 철부지 소년에 가까웠다. 두 동생의 형이자 오빠였고 가장 역할을 해야 할 순간도 있었지만 자의는 아니었다. 얽매이기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얽매인 내 자신이 싫었을 것이다. 한없이 작아진 부모님께 철없이 대들었고 나아질 구석이 없는 집이 싫어 뛰쳐나가기도 했다. 바닥이 짚이지 않는 물 속을 헤엄치는 기분, 술을 마시고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을 탓하고, 유복한 불알친구가 밉다고 멱살을 잡고, 길가의 쓰레기를 걷어차다가도 더이상 탓할 게 없어 탓할 것은 나뿐이었다.
더 나아지려면, 아니 살아지려면 그렇게 나 자신은 나에게 훈육의 대상이었지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서툴고 어렵다.
내가 훈육이 대상이 되는 순간부터 나는 나에 대한 채찍질을 멈추어본 적이 없다. 나 스스로 나에게 '그만하면 됐어'라고 말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칭찬에는 더더욱 인색했다. 열등감은 나를 계속 쉬지 않게 만들었고, 해결되지 않는 결핍은 내 꿈과 욕심을 키웠다. 이들에서 비롯된 나의 모습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었다. 울퉁불퉁하고, 모나고, 잘 만들어지지는 않은 그래도 조금은 단단한, 그런.나의 모습일 게다.
다행히도 그 때 보다는 상황이 나아졌기에 이 글 또한 적을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나는 자그마하게나마 무언가를 이루고 있고, 하고 싶은 것들을 실현하고 있으며, 꺼질 듯 위태롭던 나의 꿈도 이제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되어가고 있다.
아마도 내가 '거금을 주고' 값을 치른 대학 졸업장의 값어치는 그것을 치르기 위해 겪어왔던 그동안의 시간과 곁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 같다. 내가 겪은 과정 또한 분명히 의미가 있겠지만 내 자식은 나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social security가 없이 칼끝을 걷는 느낌을 그 아이는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인지 아직 남아있는 나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정하지만, 이제는 안정을 찾고 싶다. '나'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 또한 그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앞만 바라보고 올라온 산인데, 앞에는 또 고지가 있다.
잠시나마 허탈함을 느끼지만 또 올라가야 겠다.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다. 종국엔, 나에게도, 아무 걱정없는 행복한 날이 올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