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의 우리들

by 노엘

새벽녘에 깨어 한참 동안 쓰던 글을 모두 지웠다. 함께 올릴 사진을 찾으려고 숨겨진(?) 블로그를 열어 시간 여행을 하다 보니, 지금 쓴 글은 어디를 보아도 곧 죽을 사람의 글처럼 읽혔다. 대신 마음을 위로해준 따뜻한 글을 붙여 넣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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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나는 그녀에게 뭔가 서운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사실 그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다시 그러고야 말았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시기였고, 그녀는 좀처럼 여유가 없었다. 나 역시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미래도 없는 불안감만 가득한. 우리가 아직 학생이었던. 그런 20대의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계절은 변해 가을이 찾아왔고, 아침저녁으로 쌀랑해진 날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변해가는 냄새가 신기해 킁킁 거리며 공기 냄새를 확인하고, 서로의 소감을 물어보는 그런 날들이었다. 나는 사과의 의미이자 그녀가 시키는 대로 매일 같이 그녀가 있는 도서관에 함께 가기로 했다. 편도 2시간의 거리였고, 왕복을 하자면 네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움직였던 것은 아니지만, 낯선 곳에 있는 그녀가 머물던 도서관은 어느샌가 생활의 일부가 됐고, 나도 조금씩 그곳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녀의 시험이 지나고 자연스레 그 도서관은 가지 않게 됐다. 겨울이 찾아오고, 다시 계절이 변하고, 그녀와 멀어지고 난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곳 생각이 아련하게. 따뜻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리는 불안했다. 그런 불안감 때문일까,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주변을 보지 못한 채 나를 중심으로 행동하기 마련이었고, 그로 인해 그녀는 외로웠을 것이다. 아니, 그럴 때마다 외로웠다고 했다. 어렴풋이 그리는 미래는 있었지만, 그것이 내 일인 것 같지 않은 막연한 미래들이었다. 도저히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심해의 생물처럼 그것은 존재만 하는 것 같았고 우리들은 겁이 많은 두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이라고 무언가 특별히 안정이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불안감은 현실 어디든 존재하고, 당장 내일의 일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때는 더 젊었고, 더 예뻤고, 필연적으로 만나게 돼 서로를 이끌어주고, 기대어 왔었다고 믿고 있다. 나의 흔들림을 그녀가 잡아주었고, 불확실한 미래임에도 옆에서 조용히 내 손을 잡아주었었던 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녀와 멀어진 이후 몇 명인가의 사람을 만났고, 나는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환상과 호기심. 그리고 욕심과 성욕 같은 것들의 응집체가 아니었을까. 하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직 궁금하고 하고 싶었던 것이 조금 더 많았을 뿐이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까지 상처 입히는 짓들을 얼마간 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러다 문득. 스스로가 너무 거칠어지고 중심이 바로 서있지 못한 채 불안정된 모습으로 서 있는 걸 깨닫게 됐다. 나는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메아리였고,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시절 조용하게 나를 감싸주던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온기가 사라졌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제, 잠들 무렵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다신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그녀는 행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행복에 더 이상 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 정말 마지막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내가 서운했던 부분들을 그녀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고, 나도 이제서야 자존심 때문에 지키던 많은 것들을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잠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내가 그 시간 속에서 느끼던 행복감과 안정감 같은 것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낼 수 있었다.


행복했으면 한다.


그녀도, 나도. 우리도.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이제 어깨에 힘을 빼고, 다시 천천히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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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이제 막 어시스턴트를 시작할 무렵이었고, 블로그 내에선 제법 알려진(?) 사이였던 관계의 마지막 글엔 그녀를 포함한 많은 응원과 따뜻한 덧글들이 달려있었다. 새삼 지금의 어두운 기분이 뭔가 싶어졌다. 고마워, 과거의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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