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돌

by 노엘

크리스마스 다음날 아침 주말의 거리는 놀라울 만큼 한산했다. 차도, 사람의 기척도 거의 없어서 한순간에 인류가 증발해 사라져 버린 도시 같았다. 나는 이런 종류의 아포칼립스적 고요함을 좋아한다. 이 무렵이면 행복해야 한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오히려 그것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단 하루가 지난 것만으로도 모든 순간이 리셋되는 느낌이 좋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는 빈 틈이 생긴다.


이브날 늦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위스키를 반 병 정도 마셨다. 덕분에 25일 당일은 줄곧 상황이 좋지 않았다. 거실의 흔들리는 소파에 앉아 집중하지 않아도 될만한 영화를 두 편 정도 보고, 해장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후배가 보내준 피자와 치킨텐더를 점심과 저녁에 나누어 먹었다. 그 틈에 몇 번인가 쪼개어 낮잠을 자고 나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크리스마스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휴대전화는 종일 많은 소식들을 전해주는데, 집안에서 숙취를 끌어안고 혼자 멍해 있는 광경이 우스웠다.


집에서는 국내 공중파를 볼 수 있는 계약이 되어 있지 않아서, 가지고 있는 수상한 기기(?)로 간혹 일본의 방송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빈도는 연말이 되면 높아지게 되는데, 보다 보면 연말연시 분위기가 물씬 느껴져서 거기서 오는 따뜻함을 좋아한다. 자주 보는 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방송에 무엇이 편성돼 있는지도 자세히 모르는데, 어제 켜 두었던 방송에서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건 국내에서도 유명한 클립들은 자막이 달려 도는 것을 몇 번인가 봤는데, 그것이 전부였고, 실시간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장 마지막 편지는 80대 할머니의 사연이었다. 스물두 살의 너는 농가에 시집을 와서 밤낮없이 일하며 몹시 힘든 생활을 하지만으로 시작되어, 10년 전에 남편을 먼저 잃었다는 이야기로 끝이 나는 듯했다.

"지금도 가끔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요, 그런데 항상 받을 수 없다는 말로 끝이 나요." 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품인 휴대전화를 아직도 사진 옆에 놓아두고 지내고 계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걸 그랬어요. 스물두 살의 나야,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지만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누어줘"


밥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눈물이 나서 한참을 고생했다. 시간과 나이는 한쪽 면에서는 숫자가 변하는 것뿐이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면 돌아보는 일들도 많아진다. 여러 형태의 사랑에 관해서도 생각하고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못난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면서, 얼마간 용기를 내어보기도 한다.


다가올 시간들엔 가벼운 돌 같은 마음을 가지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