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계절

by 노엘

"나에게 당신은 어떤 존재인 걸까요?"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허공에 맴도는 단어들을 맞춰보려 했지만 한 마디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완성시키지 못했다. 영원 같은 적막이 흐르고, 다시 한번 여자가 말했다.


"이제는 마음을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이만 끊을게요."


방금 전까지는 곧 발발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3차 세계대전이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 모두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과 우크라이나 국기가 가진 푸른 하늘과 황금색 밀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대립하는 입장에 관해 서로의 의견을 말하던 중이었다. 인터넷 상의 평화롭고 무의미한 덧글에 한 번 더 상처를 받는다는 말에 공감했고, 지금까지 배우고 노력해온 것들이 현재의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괴롭다고도 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3년 정도 전의 일이었다. 배를 타러 가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에 '무슨 배를 탄다는 거지, 둘이서 노를 젓는 그 작은 배인가?'라고 생각은 했지만 특별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러겠다고 말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타게 된 건 상상했던 모양의 배는 아니었다. 여러 명의 관광객이 10m 정도 되는 기다란 나룻배에 두 줄로 앉고, 뱃사공 한 명이 노를 저으며 마을 사이의 물길을 이동하는 관광 코스였다.


아마도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남쪽 섬의 바람은 온화했고, 나이가 지긋한 뱃사공은 평온하고 온기 있는 목소리로 야나가와(柳川) 마을과 계절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천천히 노를 저었다. 배가 지나는 그리 넓지 않은 수로 곳곳에는 이름처럼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방해될세라 사람들은 소곤거리며 대화했다. 달그락 거리며 울리는 노 젓는 소리는 신학기의 따스한 햇살 같았다.


배를 탄 내내 나는 줄곧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혼자 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녀가 돌아보는 일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한 손에 들고 탔던 아이스크림은 이른 봄처럼 천천히 녹아갔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평화로운 버드나무의 물길은 나른한 낮잠처럼 지나갔다.


배에서 내려 제법 비싼 장어덮밥을 먹었고, 한참 동안 마을 곳곳을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 특별히 목적지는 없었고, 몇 년에 한 번 그녀와 만나는 날이면 항상 많은 곳을 걸었다. 그리고 헤어지는 순간이면 처음과 마찬가지로 짧은 인사를 나누고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역에서 헤어졌다.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는 그녀를 불러 세워 서투른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어휘가 부족한 사람이라니 언어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얼마간 오해가 해소된 듯했지만, 그것이 오해였는지 스스로가 어떤 방향으로 어떤 말들을 했어야 했는지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그녀가 원하던 답변 같은 것이 있긴 했었을까.


많은 마음들이 상실되어 간다.


숨죽인 2월은 흐느끼듯 지워져 갔고, 작은 부정에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모두의 시간 위에는 먼지가 쌓이고, 그때 우리가 빛나고 있었다는 건 모두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슬프게도 겨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계절은 지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봄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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