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함께 열대야가 찾아왔다. 일본 근해로 통과하는 태풍이 몰고 온 고온 다습한 공기 덕분에 서울은 비가 내리지 않아도 수영장에 있는 것처럼 습도로 가득했다. 낮 기온은 35도를 넘겼고 해가 저물어도 여전히 푹푹 찌는 날씨가 이어졌다.
일찍 잠이 들려다 더위에 깨어난 늦은 밤이다. 문득 호기심이 생겨서 집에 있는 아이맥에 저장된 가장 처음의 메모를 찾아봤다. 이 메모장은 휴대폰과 동기화가 되어 있어서, 2013년부터 기록이 돼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누군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번호만 저장된 것들이 제법 있었고, 주소도 꽤 많았다. 단순히 “청담역 13번” 이렇게 저장된 것도 있었다.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야 할 사람이나 이동해야 할 위치였을 것이다.
2013년 9월 2일 오후 6시 48분엔 “발끝을 보는 시간이 조금 늘었다.”라는 짧고 쓸쓸한 메모를 남겼다.
“구두의 지퍼” 라든가 “바지 주머니 유감”과 같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메모들도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아마도 제법 힘든 날의 메모로 추정되는 것이 있는데, “잘 되어도 응원할 사람 없고, 안 되어도 도와줄 사람 없다.”라는 기록도 있다. 누군가가 해주었던 말 같기도 하다. 여전히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중간에 매력적인 입술을 가진 여자에 대한 묘사도 있는데, 미안하지만 누구였는지 전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내용을 보면 제법 가까웠던 사람 같은데 누구였을까. 그리 길지 않아 옮겨본다.
여자는 매력적인 입술을 가졌다. 도톰한 편은 아니지만 작지는 않은 입술이었다. 길고 가느다랗게 끝으로 곧게 떨어지는 입꼬리는 섬세하고 가지런하게 정돈된 붓 끝을 연상시켰다. 나는 때때로 여자의 눈을 손바닥을 가리고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완성된 하나의 별개의 생명체 같았다. 살짝 열린 그 사이로 때때로 내 이름이 새어져 나왔다.
이 무렵 피쉬맨즈의 존재를 알게 됐고, 제법 오래 들었던 모양이다. 사실 열대야와 어울리는 이만한 음악도 없다. 뿌연 담배연기와 인센스 냄새가 가득하고, 동굴처럼 어둡고 촛불이 흔들리는 어두운 바가 떠오르는 그런 음악들이다. 실제로 비슷한 장소에서 피쉬맨즈의 노래들을 우연히 듣게 되기도 했다.
여름의 낮은 지루할 정도로 길고, 밤은 서글플 정도로 짧다. 아직 채 끝나지도 않은 장마가 지나면 얼마나 더 더울까. 우린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