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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엘 Aug 07. 2023

차분하게 화내기


"실장님은 차분하게 화내시는 스타일 같아요.”




“그게 더 무서워요. 차라리 그냥 화를 내세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확실히 나는 현장에서 종종 화를 낸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이게 참 뭐랄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촬영 현장은 대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가 모두가 납득할 만한 이상의 비주얼이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비추어졌을 때뿐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빙하기가 찾아온 것처럼 냉랭한 공기가 흐른다.




가장 첫 컷은 언제나 테스트를 본다며 시작하지만, 어디까지나 문자만 테스트이지 이 한 컷에 오늘 하루의 방향이 결정된다.




결과가 좋은지, 좋지 않은지의 판단은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모니터에 집중한 십수 명의 반응은 절대 연기 하거나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업적 인물 촬영은 대체로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자자 이런저런 부분을 수정해야 하니까 잠깐 기다리세요." 같은 건 안 된다. 어시스턴트를 하던 때에도 안 되었고, 내가 하는 지금에도 당연히 안 된다. 프로들이 모여서 협업하는 판에, 그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등 뒤는 죽음뿐인 절벽이다. 오늘을 망치면 내일 같은 건 영원히 없다. 이런 기분으로 거의 십여 년을 지내왔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그런 일들로 너무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역시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내고 있지 않아요. 같은 얼굴을 하고선 화를 내고 있었어요.”라고, 어딘가 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촬영 내내 자꾸 이 말이 생각나서 부끄러워 멋쩍은 웃음이 났다.




그러다 보니 이제껏 스쳐 지나간 사람들도 생각나고, 지금 가장 오래 해주고 있는 소희에게 새삼 고마운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나는 어렵고 불편한 사람일 것이다. 어떤 부분에선 느슨한가 싶다가도 미친 사람처럼 절대 타협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런 잘 알 수 없는 기준 때문에 때때로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사실 화를 내뱉고 나면 이후에 줄곧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 어시스턴트 시절엔 촬영 후에 늘 후배들에게 술과 밥을 사며 오해를 풀었다.




현장이 시작되면 목표는 늘 동일하다. 가장 완성도 높은 결과를 만드는 것. 그것뿐이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뒤돌아 생각나지 않을 만한 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악마와 계약이라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해도 아쉬움은 늘 남으니까.





대부분 사람은 늘 빠르게 결과를 내려고 한다. 물론 천재적인 재능과 노력이 합쳐진 사람들은 그렇게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꾸준히 지금까지 해왔던 것의 완성도를 치밀하게 쌓아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실수가 생기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고 탓도 아니다. 지루하고, 시간은 걸린다. 하지만 목표 지점이 있고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 확신하는 건, 이미 경험한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네, 여기까지 긴 변명이었습니다. 언젠가 힘들었던 날들을 돌아보며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조금 더 상냥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엔 더 즐거운 현장에서 함께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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