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냄새를 잘 기억하는 편이다. 물론 모든 것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대체로 좋아하는 것들에서 느껴지던 냄새는 제법 잘 기억한다. 특성상 무어라 말로 표현 하긴 어렵지만 다시 조우했을 때 반드시 알아보는 편이다. 맞아! 이 냄새였어! 하고
지하철로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던 무렵엔 낯선 여성분의 향수 냄새에 너무나 이끌려서 몇 번이나 뒤돌아 봤던 적이 있다. 어떤 향수를 사용하시나요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부끄러움 레벨이 높은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인가 다시 그 냄새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때마다 얼마나 궁금했는지, 짐작되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대체 누구일까 하고 무척이나 두리번거렸다.
언젠가는 드럭스토어에 가서 모든 여성 향수의 시향을 하며 찾아보려고 한참 동안 판매대 앞을 얼쩡거리던 적도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기묘한 풍경이다. 점원은 여자 친구 선물이라도 찾나 싶었을 테지만, 머무는 시간도 길고 모든 향수를 킁킁대고 있으니 저 기분 나쁜 손님은 그냥 빨리 나가주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아무런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거나.
하지만 그 향은 정말이지 뒤돌아 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향이었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의 취향 정중앙을 노리고 만든 것이 틀림없는 그런 형태의 것이었다.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와 좋은 분위기가 되어서 처음 손을 잡고 설레던 날의 달콤한 봄바람 냄새 같은 향이었다(ㅋ) 아무튼 처음의 그 말초신경을 깨우던 순간은 지금에 와서도 잊히지 않는다. 향 하나로 이렇게 세상이 바뀔 수 있구나 싶었다.
아무튼 수년이 걸려서 나는 그 향을 찾아냈다. 유레카를 외쳐도 될만한 순간이었다. 버버리의 여성라인 제품이었는데, 나는 바로 향수를 구입해서 만나던 여자아이에게 선물을 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리 향수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처음에 몇 번인 가는 아마도 예의상 사용해 주었지만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러면서 나도 점차 그 향을 잊게 됐다.
스무 살인가 스물한 살에 처음으로 향수 선물을 받았었다. 정확한 이름도 모르는 랄프로렌의 짙은 파란색 병이었는데 상당히 중성적인 향이었고, 거의 다 사용한 시점에서 다시 구해보려 했을 때엔 국내에 들어오지 않는 라인이 돼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나한테 맞는 향수를 찾으려고 이것저것 사용하기도 하다 CK의 제품을 제법 오랫동안 써왔다. 처음엔 가성비가 좋은 느낌이었는데, 나를 그 향으로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나서는 정이 붙어서 더 오랫동안 사용했었다.
최근에 와서는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향수를 사용한다. 면세점에 갈 때마다 다른 건 사지 않고 향수를 하나씩 사는 습관(?)이 생겨서 하나 둘 사다 보니 숫자가 제법 늘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자신의 향이 뒤죽박죽이 된 건 아닌가 싶어서 다시 예전처럼 같은 걸 계속 사용해야 하나 싶다가도 기분이나 날씨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도 나름 기분 전환이 되어서, 일단은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손에 잡히는 걸 사용하는 편이다. 물론 만나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서도 조금 가린다.
한동안은 에르메스의 제품을 사용하다 최근엔 구찌의 제품을 가장 애용하고 있다. 티파니는 의외로 스파이시하고 남성적인 느낌이 세서 상쾌한 느낌을 내고 싶을 때만 사용한다. 딥티크의 제품들도 좋아하는 편인데, 퍼퓸라인도 지속력이 약한 편이고 개성이 강해서 이 역시 크게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참 그리고 에르메스의 라인중에 몹시 고급 리조트의 향이 나는 녹색 병의 제품이 있는데 지속력은 낮지만 자기 전에 뿌리면 마치 휴양지로 여행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위로가 필요할 때 때때로 사용한다. 그래서 그런지 외출보다 집에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지속력이 짧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데일리로 사용하는 건 지속력이 길고 향도 더 취향에 가까운 제품이다.
이런저런 기억에 남는 냄새들이 있고 좋아하는 것도 많지만 그중에서 특히나 기억에 남고 지금도 고민 중인 것이 있는데 섬유유연제의 선택이다. 사실 이 고민을 하게 된 것은 일본에 자주 가면서부터 그랬다.(지금은 못 가지만 ㅠㅠ) 가장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았다. 대체 이건 뭔가 싶었다. 그 냄새는 도심으로 빠져나오는 전철에서도 도심 곳곳에서도 때때로 느껴졌다. 일본에서 지내던 친구가 한국에 올 때에도 그 냄새가 났다. 물론 일본인 친구에게서도.
나는 편의상 일본 냄새라고 칭하는데, 햇볕에 바삭바삭 잘 말린 세탁물 같은 형태의 향이다. 늦은 여름 배경의 그리운 청춘드라마 같은 냄새. 이 냄새의 정체를 찾아야만 했다. 고민 끝에 아무래도 섬유유연제가 아닐까 싶어서 거의 모든 종류의 섬유유연제를 사서 사용해 봤다.(강물에다 섬유유연제를 푸는 건 아닐까 하는 망상도 해봤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기 때문에, 여행 갈 때마다 부피를 고려해서 세 가지 정도 종류씩 밖에 가져올 수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사용에도 시간이 걸려서 사실은 아직도 실험 중이다. 정말 비슷한 제품이 있는가 하면 완전히 다른 제품도 있어서, 아- 역시 기후가 달라서 다른 냄새가 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펜데믹의 영향으로 한동안 가지 못 해서 이제 새 제품은 한 팩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며칠 전 뜯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제품에서는 기대하던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빨리 더 많이 세탁이 하고 싶어질 정도다. 지난번 것과 같은 제품을 어떻게든 공수해보려고 고민을 하고 있다.
기억은 여러 형태로 저장되고 재가공되고 하지만, 냄새라는 건 상당히 중요한 법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 쾅! 하고 한순간에 돌아오기도 한다. 멀어진 사람의 그리운 냄새가 되기도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던 것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의 것이라면 다시 보고, 좋아지기도 한다. 때때로 궁금하다. 나에게 좋은 냄새가 난다고 해줬던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