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오후부터 잠이 들었다. 장마가 시작된 도시는 짙은 회색 빛으로 가득했다. 하루가 빗소리로 가득 찼다. 걸려온 전화 너머에서도 빗소리가 들려왔다.
낮잠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었다. 눈을 떠도 몇 번이고 몇 시간이고 언제까지라도 잠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도 메시지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보려고 생각만 하고 있던 영화를 봤다. 어렴풋이 각오는 했지만, 오래전 일과 겹쳐지는 부분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서, 심장이 조각난 것처럼 아팠다. 잊고 있었던 종류의 아픔이 쾅하고 돌아왔다.
10년 전의 나는 만나는 사람들 마다, 내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말하고 다녔다. 그렇게 하면 잃지 않을 것만 같았고, 작은 구원이라도 필요했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나의 이야기들에 호기심을 가져 준 몇몇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게 될 일이 있었는데, 그중의 한 명은 후에 여자 친구가 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낮부터 술을 마시기도 했다.
며칠 전 후자 쪽에서 문득 비공개 안부글을 남겼다. 나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연상의 여성이었다. 왜 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직업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말투와 옷차림 등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제법 재력이 있는 듯한 느낌을 하고 있었다.
그 만남은 기묘했다. 어딘가 상처로 얼룩진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 대낮부터 어색하게 술을 마셨다. 압구정의 어두운 지하 카페 같은 곳이었다. 주말의 낮이었던 그 장소에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다. 여자는 익숙한 곳이었는지 나에게 술을 권했다. 낮부터 카페에서(인지 어떤 곳인지 사실은 잘 알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술을 파는 곳이 있다는 것에 조금 놀랐다.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사랑을 증명하듯 많은 말들을 쏟아냈고, 이상할 정도로 취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말을 토해내고, 그렇게 헤어졌다. 이후에 우리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남겨진 안부글에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그 당시 우리가 차를 마셨었는지, 무얼 했는지, 시간이 지난 만큼 많은 것들이 변했다는 짧은 메시지였다. 사실은 그 기묘했던 여인에 대해서 이따금 떠오를 때가 있었다.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로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말할 수 있었다. 어느 방향인가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득히 먼 평행선 너머였고, 누구에게라도 토해내지 않고는 오늘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아주 먼 일이 된 계절과 사람들. 우린 서로 모른 척 살아가지만, 모두 그렇게 삶의 마지막처럼 사랑했던 날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