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저녁

by 노엘

오랜만에 합정동에서 집까지 걸었다. 참 많이 걸어 다녔던 길인데 새삼스러운 풍경들이 많았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 놓치는 주변의 작은 그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음식점들은 내가 기억하는 곳이 아닌 장소가 되어 있었다. 서교동을 지나 익숙한 동교동 뒷골목을 걸었다.


가장 처음 자취를 시작하던 집은 여전히 게스트하우스로 영업 중이었고, 세상의 끝이 있던 자리도 그리 오래갈 것 같지 않은 흔한 모습의 술집 그대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밥스바비에 사장님이 있으면 들려서 한 잔 더 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슬쩍 보니 직원 분들만 있는 것 같아서 다음으로 미뤘다. 대신 푸하하에서 생크림 빵을 두 개 샀다. 늘 세트처럼 먹던 소금 크림과 딸기맛.


두 번째 자취를 하던 집이 있던 푸하하와 연남 공원 사이의 빌라는 건물을 완전히 허물어서 빈 공터만 남아 있었다. 부동산에 연락해서 물어보니 서울 시내에 건물을 많이 소유한 집주인이 세금 문제 때문에 철거 후에 공터인 채로 두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의 정책이 변하면 신축을 올릴 계획이라고 한다. 음. 나도 그런 고민을 해보고 싶다.


2년 남짓이지만 지내던 곳이 완전히 공백처럼 사라진 기분은 어딘가 삶의 일부가 누락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과 인연들을 잠깐 생각하면서 걸었다.


일이 아닌, 사람과 하는 저녁 식사는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한두 달은 더 지나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최근 긴 말들을 하려다 보면 버벅거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머리의 회전도, 말을 하려는 입의 움직임도 싱크가 잘 맞지 않아서 멍청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추석 연휴가 코앞인데 사실 잘 실감 나진 않는다. 매일 달려오다가 갑작스러운 휴일이 찾아오면 무얼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연휴까지 촬영이 하나 남았다. 후반 작업들이 많이 밀려있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한숨을 돌릴 틈은 생긴다. 오후의 촬영을 위해 다시 조금 더 자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해 질 무렵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