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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Kim Jul 30. 2017

<노동에 의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노동>

일본 드라마 <단다린 노동기준감독관>


단다린 노동기준감독관(2013)

주연: 다케우치 유코(竹内結子), 마츠자카 토리(松坂桃李), 키타무라 카츠키(北村一輝), 

        카자마 슌스케(風間俊介)

장르: 사회물, 코미디

편성: 니혼TV

편수: 11부작


 "우리에게 '노동'이란 무엇일까?"를 물어본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일까?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마도 긍정적인 대답보다는 부정적인 대답을 들을 확률이 높다. 우리의 인생에서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삶의 모든 목표가 '노동'이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 노동을 하기 위한 '관문' 역시 좁아지다 보니 더욱 이러한 현상은 심해진다. 또한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불합리한 갑질과 억압, 비민주적인 직장 문화 등이 더욱 심해지는 것도 노동이 인간의 삶을 얽매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삶을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지만 그 노동으로 인해서 뺏기는 삶은 결국 사람이 회사의 하나의 도구가 되게 만들고, 사람으로서의 나는 없어지는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회사 내에서도 노동자들을 미천하게 보게 만들고 빈부귀천을 전부 따지더라도 모두가 하고 있는 노동을 비천한 것으로 만드는 모습도 나타난다. 촛불시민혁명으로 부패하고 반헌법적 정권을 무너뜨린 힘이 있는 우리들이 왜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있는 직장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일까? 어떠한 현실이 우리를 옥죄는 것일까 생각해 보던 중에 바로 <단다린 노동기준감독관>이 떠올랐다. 


노동기준감독관인 단다린은 노동현장의 잘못된 것을 보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노동자를 지키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표어처럼 이 드라마는 노동기준감독관들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노동자를 핍박하는 악덕 사용주들에게 응징을 하기 위해서 존재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무원'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도쿄 노동기준감독서 또한 이러한 공무원의 안정성과 안전 우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곳에 단다린(다케우치 유코)이 부임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점점 깨지게 된다. 짧은 쇼트커트와 인민복 스타일의 회색 옷, 잘못된 노동현장을 보면 어딜 가서라도 뛰어 드는 모습은 회사 동료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스타일이고, 이로 인해서 전에 부임했던 곳에서도 쫓겨나 서도쿄 노동기준감독서에 부임하게 된 것이다. 서장이 처음에 요주의 인물로 지도감독관을 지정해줄 만큼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혔으나, 단다린의 열성에 많은 사람들이 점점 감화되어 이른바 '단다화'가 진행될 만큼 자신의 일을 자각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다른 노동기준감독관들이 귀찮아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단다린은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아마도 그냥 주변 사람들을 감화하여 제대로 제 역할을 만드는 모습에서 드라마가 끝난다면 아마도 이 드라마 주목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주목을 끌 수 있는 까닭은 한 회, 한 회에서 드러나는 사용자의 다양한 노동자들에 대한 핍박과 착취를 이 드라마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잔업수당을 마땅히 주게 되어 있지만 '당연하게' 잔업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회사, 사장이 성희롱을 하여 노동기준감독서에 신고를 하지만 내부고발자로 찍혀서 갖은 보복을 당하는 여성노동자, 열정을 요구하면서 청년들을 부리지만 연수라는 이름 하에 착취하고 내쫓는 회사, 회사 능률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관리직을 생산직의 말단으로 이동시켜 산업재해를 당하게 만드는 회사, 겉으로는 열정을 이용하여 성공한 사업가지만 사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얻은 명성이었다는 것 등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부리면서 인권을 핍박하는 모습, 도급을 활용하여 개인사업자인 청소부와 계약했지만 불합리한 업무지시를 내리고 전혀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를 하지 않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현실 등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회사는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연수'라는 이름으로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키고 평가한다.

 단다린은 이러한 문제를 목격하고 사업자들이 노동기준법 등의 법을 위반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감독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단다린이 성질에 못 이겨 못된 사업주들을 때리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모욕보다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의 공로를 무시할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특히 성희롱을 일삼던 사장이 노동기준감독서에 자신을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면서 남자 스태프들에게 "모름지기 사장에게 오른쪽 가슴을 내놓았다면 왼쪽 가슴도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할 때 단다린이 달려가서 사장을 때린 것은 참으로 통쾌했다. 

 하지만 단다린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노동자들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는 단다린에게 협조하는 모습이고 두 번째는 단다린의 감독활동을 막는 모습이다. 첫 번째 모습보다는 두 번째 모습이 훨씬 많이 나타나는데, 자신이 벌지 않으면 가족들과의 가정생활에 어려움에 처하기 때문에 만일 자신의 신고로 사장이 고초를 당한다면 회사에서의 자신의 안위가 불안해지기 때문이고, 청년들의 경우 어렵게 들어간 회사인데,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서 자신의 내정이 철회되고 남더라도 내부고발자로서 출세가 막힌다는 불안 때문인 것이다. 또한 주변 동료들의 눈치와 구박도 단다린과 노동기준감독관들이 감독활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기도 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생활이 위협을 받는다는 이유로 노동기준감독관들의 현장감독은 노동자들에 의해서 방해받는다.

 이러한 장면을 볼 때 '노동자들이 왜 저렇게 법의 집행을 방해할까?'나 '저런 노동자들을 보호받지 말아야 해!'와 같은 원초적인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러한 생각보다는 그런 노동자들이 매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노동자들의 불리한 현실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그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 보이고 결정적으로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는 노동현장에서 잘못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생활이나 여러 가지 위협에서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직장생활의 현실을 반영하거나 희화화하는 웹툰이나 매체들이 요즘 들어서 나오고 있지만 정작 직장 안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아마 단다린과 같은 노동기준감독관들이 당신이 일하는 회사에 들이닥친다고 했을 때, 여기서 보여주는 인물들과 달리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고 감독관들을 도와주는 회사원들이 얼마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야말로 노동이 내 삶을 완전히 잠식하는 <노동에 의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악덕사업주들은 자신의 회사의 업적을 노동자의 공로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업적으로 치장한다.

 드라마 내에서 단다린과 노동기준감독관들이 열심히 뛰더라도 이 드라마에서는 100% 노동자들이 승리하지 못한다. 분쟁 중에 다양한 방법으로 합의가 되거나 아니면 함부로 움직였다가 제대로 된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그 반대 상황으로 내몰리곤 한다. 특히 합의가 되어 문제가 해결이 될 때는 본질적인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말단 간부가 이 상황을 책임지게 되는 이른바 '꼬리 자르기'가 횡행한다. 사건이 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자본은 그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조직사회를 위해서라면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머릿속으로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자신의 여러 가지 면으로 오히려 합리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노동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노동에 의한 삶>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에 의한 삶>이 <삶을 위한 노동>이 되기 위해서는 용기와 신뢰가 필요하다.

 이러한 <노동에 의한 삶>이 <삶을 위한 노동>으로 바뀌는 데는 여러 가지의 노력과 의식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불신이 매우 팽배하고 있는 조건에서는 국가나 회사에서의 어떠한 선의적인 결정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쉽게 믿을 노동자들은 없다. 한 번도 정부와 회사들이 노동자들에게 신뢰를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촛불시민혁명에서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정부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체험을 하고 느낀 것이 많았지만 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중심으로 들어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새로운 정권 하에서 우리는 노동문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요구를 해야 할 것이다. '쉬운 해고'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면서 노동자들을 인간이 아닌 도구임을 인정했던 전 정부와는 달리 이번 정부는 그나마 '사람이 먼저'임을 드러내는 정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노동'이라고 한다면 막노동을 생각할 만큼 이른바 천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오히려 '근로자'라는 이름의 뜻이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사업주들이 원하는 인식을 담고 있고, '노동자'라는 말이 더욱 주체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로'라는 이름을 더욱 많이 이용한다. 내가 일하고 있는 일도 노동이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노동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일들은 노동이다. 우리가 노동을 천하게 보는 시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저 우리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요구받는 일하는 수동적인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도 우리가 주체적으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용자들의 불리한 요구 등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드라마 상의 노동기준감독관들은 '일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단다린 노동기준감독관>은 노동기준감독관의 시각을 통해서 현재의 노동환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자 자신이 자각을 해야 함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정부가 노동자들에 대해 법적으로 규정된 것만 잘 지켜준다면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에도 '근로감독관'이 존재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인력과 턱없이 약한 권한으로 노동자들의 핍박당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국가에서 기본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데, 노동자들이 국가를 믿기를 바란다면 그것 역시 또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그의 공로를 인정받고 그 대가를 받으며, 삶을 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세상이 과연 한국에 도래할 것인가? <단다린 노동기준감독관>을 보면서 한 편으로는 희망을 보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너무 그 희망이 멀리 있어 절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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