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우연과 상상> 리뷰
아주 다행스럽게 장작가마에서 자기를 꺼내는 걸 직접 본 적이 있다. 기다란 황토가마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자기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색을 품고 있다. 색이 다 다르다는 내 말에 장인은 ‘같은 유약을 발라도 가마의 온도, 그날의 습도에 따라 나오는 작품의 색깔이 모두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같은 방법으로 구웠지만 아주 우연한 요소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는 것. 그 순간 그게 진정한 자기의 매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우연과 상상>은 바로 인생에서 우연인 순간을 포착해 낸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문은 열어둔 채로', '다시 한 번'으로 세 개의 단편 에피소드로 이뤄진 이 작품은 거짓말 같은 우연의 순간을 따라가며 사랑을 들려준다. 이별하고 그 이별을 잊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낸 첫 에피소드. 왜 이렇게 길게 차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넣었지 라는 의구심은 영화의 결말을 따라가다 보면 이해가 되고, ‘문은 열어둔 채로’에선 단 한 순간 서로의 영혼이 마주했던 시간이 우연한 실수로 파국을 맞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다시 한 번’에선 잃어버린 사랑을 찾던 이와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두 인물(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건 서로를 혼동한 착각 때문이다)을 통해 사랑의 추억을 잔잔하게 그려낸다.
장인의 황토방에 앉아 자기를 둘러봤다. 하얀 백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형광등에 불빛을 받은 백자들은 모두 다른 하얀색이었다. 우리의 삶 역시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조건과 환경에서도 저마다 다른 색으로 빛난다. 그리고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찾아가고, 질투라는 감정이 온몸에 가득하지만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연남의 부탁을 받고 교수를 유혹하려 그의 연구실을 찾아간 여인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감춰져 있던 무언가를 발견한다. 하지만 단 한 순간 불꽃처럼 일렁이던 그것은 사소한 실수로 인해 이내 사그라들고 만다. 이렇게 사랑의 감정 가운데서도 상실이라는 감정을 조용히 그려내는 하마구치 감독.
그렇게 이야기의 구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서 파국을 거쳐 세 번째 에피소드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는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유를 어슴푸레하게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혼동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이야기로 마지막 순간 마음 깊이 가지고 있던 어떤 감정을 마주하는 것. 그렇게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랑이라는 색의 마지막은 무채색으로 연하게 빛난다. 마치 온몸을 불구덩이에 내놓아야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자기처럼 우리의 사랑 역시 상실이라는 뜨거운 화염을 통해 새로운 색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쉽게 바래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