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보는 영화
손자를 업고 천변의 노인이 달걀 껍질을 벗기어
먹여주는 갈퀴 같은 손끝이 두꺼운 마음을 조금씩 희고
부드러운 속살로 바꿔준다 저녁 공기에 익숙해질 때,
사람과 친해진다는 것은 서로가 내뿜는 숨결로
호흡을 나누는 일 나는 기다려본다
이제 사물의 말꼬리가 자꾸만 흐려져간다
이 세계는 잠깐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들로 가득 찬다
저녁의 희디흰 손가락들이 연주하는 강물로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
- 박형준의 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중에서
여기 세 명의 소년이 있다. 한시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아이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도 이들은 축구 경기에 여념이 없고, 대화를 하면서도 육교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고, 도무지 멈춰 있을 줄 모른다. 그런 소년들은 갑자기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가 궁금해졌다. 소년들은 그 궁금점을 풀기 위해 곧 죽을 것 같은 노인을 찾아가기로 한다. 소마이 신지 감독의 <여름정원>은 이렇게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심오하고 심오하면서도 단순한 것 같은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아이들은 처음 관찰하기 시작한다. 이제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집. 잡풀로 무성한 마당. 창문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노인 덴포 키하치(미쿠니 렌타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미동이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소년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관찰하다 말고 마당에 들어가 쓰레기를 치운다. 그리고 노인을 뒤쫓다 들어간 병원. 두려움과 공포의 영역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노인을 발견하고 도망친다. 마치 ‘죽음이란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거란다, 어서 도망가렴’이라고 노인이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소년들은 그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다시 노인의 집으로 향하고, 이젠 잡풀을 뽑아내며 정원을 가꾸고, 문짝을 수리하고, 지붕을 고친다. 호기심이 공포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그렇게 정적이던 노인의 시간이 에너지로 가득한 아이들로 인해 변화를 맞이한다. 이제 폐허 같던 예전의 집이 아니다. 집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자, 노인의 과거도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의 감춰졌던 과거가 드러나는 순간 노인의 과거는 역사성을 가진다. 아이들의 ‘관찰과 운동’이 바로 노인의 삶에 역사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떤 역사일까? 영화에서 보여주듯 노인 개인의 역사일까? 그걸 단순히 노인의 개인사라고 치부하기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민방공 사이렌 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게 확장될 여지가 있는지는 영화를 보며 생각해 내길 권유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히 ‘죽음’을 사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죽음은 곧 소멸이다. 하지만 소멸한다고 그래서 모든 것이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어떤 흔적을 남긴다. 노인의 죽음으로 인해 보이는 풍경은 다시 황량하다. 함께 심은 코스모스는 시들어 죽어가고, 함께 고친 집은 벽이 무너지고 지붕은 내려앉아 있다. 그렇게 소멸로 향하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죽음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노인은 죽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노인의 성찰이 그걸 가능하게 해 줬다.
노인은 마당에서 죽어 있는 나비며 생물들을 우물에 넣는다. 이 우물은 죽음이 모여 있는 공간이자, 죽음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 소년들은 이 우물에 대고 대화를 한다. 그런데 이 대화의 장면, 긴 낭하의 끝을 향해 소리치는 소년들, 그 끝에 마치 관객들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은 노인과 짧은 만남을 통해 ‘죽음’을 관찰하는 것에서 벗어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소통한다.
우린 과거와 대화하는 것에 너무 서툴다. 그냥 잊으려 하고 덮어버리기 일쑤고 무언가를 배워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꾸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한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하기 위해서 우린 과거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성찰해야 한다. 그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도 하고 어쩔 땐 정말 두렵더라도, 과거의 폐허를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바꿀 것은 바꾸고 고칠 것은 고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