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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Jan 27. 2021

더 이상 기다림은 No No No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호주에서의 29년 살면서 많은 기다림이 있었다. 그중에서 23년 동안 어쩔 수 없이 남편을 위한 기다림도 있었고 아들을 위해서는 18년 동안 자진한 기다림이 있었다. 이렇게 나를 오래 기다리게 만든 사람으로는 남편과 아들이 있다.


남편에 대한 기다림을 접다.

나를 호주로 끌었던 사람도, 호주에 남겨두고 떠난 사람도 남편이었다. 나는 남편을 선택한 책임감으로 함께 호주에서 10년을, 그러다 남편의 독단적인 선택과 결정으로 호주에 아이와 남겨져 13년을 그렇게 23년 동안 남편의 성공을 지원하며 기다림을 이어갔다. 그렇게 나의 23년을 기다림으로 보냈으나 기다림과 인내라는 톱니바퀴에는 신뢰라는 기어를 넣어주어야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년이 지난 어느 날 기어는 이미 부러졌고 톱니바퀴만 허허롭게 돌아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부러진 기어를 뽑아내고 허허롭게 돌아가던 톱니바퀴를 그제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남편에게 더 이상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지 않겠다고 편지를 썼다. 23년이라는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남편에게 3번의 손편지를, A4용지 6-8장에 써서 보낸 적이 있었다. 두 번의 편지는 격려하고 응원하는 편지였고 마지막 3번째 편지는 6년 전 이별의 편지였다. 남편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천천히 갚아 주겠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엄청난 위자료를 내가 남편에게 주었다고 생각하면 마음도 편했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서 남편을, 한 사람을 완전히 지웠다. 친정에서는 엄마와 언니들은 진즉에 했어야지 하며 나의 젊은 시절을 그냥 보낸 아쉬움을 비추셨지만 나의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이셨다. 한 톨의 원망도 미련도 후회도 없이 한 사람을 좋게 지우며 나의 남편을 향한 기다림을 멈출 수 있었다.


아들에게 향한 기다림은 안정이었다


34살에 6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기댈 곳 하나 없는 섬나라 호주에서 나는 가장이 되었고 아들은 온전히 나만의 책임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너무 막막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아들의 성장을 위한 기다림을 시작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다.


아이가 성장하기를 기다렸고 이야기가 통하는 성인으로 자라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는 아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 아들 등하교를 시켰고 급하게 일을 마치고 뛰어가서 하교를 기다렸다. 고학년이 되면서 아들은 항상 늦게 나왔기에 차속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림에도 익숙해졌다. 과외를 시키지 않아서 그런지 아들은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을 찾아가 궁금증을 해결하고 나왔기에 어느 순간부터 하교시간에는 거의 매일 늦게 나왔다. 아들이 늦게 나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항상 하교 전에 아들을 데리러 갔다. 나는 기다릴 수 있지만 아들에게는 엄마를 기다리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책을 읽으며 느긋하게 기다림을 보낼 수 있지만 늦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심리는 불안할 것 같아 항상 일찍 도착해 기다렸다. 그러다 천만다행인 것은 아들이 고 3이 되기 전에 내가 병으로 일에서 이른 은퇴를 한 것이었고 그제야 아들에게만 온전히 신경을 쓸 수 있었고 나의 몸도 보살필 수 있었다.



아들이 처음으로 내 인생을 알고 싶어 했다.

한 번도 내색하지도 말한 적도 없었기에 아들은 그저 행복한 아이로 잘 자라 주었다. 그러나 고3을 마치고 대학교 합격을 99.95 최고의 성적을 받아 모든 사람들의 칭찬과 부러움을 받았지만 시댁에서의 반응은 늘 잘했으니까 그랬겠지 하는 남보다 못한 반응이었다. 남편은 아들이 대학교를 입학한 것도, 최고의 점수를 받은 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아들에게 휴학을, 휴학이 아니면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권했고 나를 한국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일을 돕게 할 생각만을 했다.


나는 13년 동안 떨어져 있는 남편에게 한 번도 생활비를 요구한 적도 없었고 나 혼자 가장 역할을 충분히 다했으며 심지어 한국으로 남편에게 경제적인 사업 지원도 수차례 했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아들 대학교 입학금만은 꼭 준비하라고 늘 당부를 하며 13년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우리도 부모님의 도움으로 대학교까지 교육을 받았기에 아들에게도 그렇게 해 주고 싶었고 남편이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아 그것 한 가지만 13년 동안 꾸준히 부탁을 했었다. 아마 그것이 힘들어 반응을 그렇게 한 것 같았다.


아빠에게 그런 말을 들은 아들은 아빠의 의견에 처음으로 동의하지 않았고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다 어느 날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왔다. 아들은 나의 이야기를 전부 다 듣고 싶다고 했다. 제발 어리다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정직하게 모두 알려 달라고 아들이 간절히 부탁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아들에게 23년 동안 내가 살아온 것을 솔직하게 모두 이야기하게 되었고 우리는 그날 밤을 새웠다.


행복만 하던 아들을 울린 내 사연

내 말 끝에 아들이 펑펑 울었다. 엄마에게 너무 미안해서 운다고 했다. 엄마가 혼자 그렇게 힘든 줄 모르고 자신은 행복하게 살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펑펑 우는 아들을 보고 나는 당황하며 아들을 달랬다. 나누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너는 그때 어린 아들이었고 나누어 짊어질 문제도 아니었다고 그것은 부모가 해야 할 당연한 책임이었지만 그걸 단지 엄마는 혼자 감당한 것이라 했다. 그래도 엄마 혼자 잘 감당할 수 있었으니 굳이 너에게 표시 내지도 말하지 않은 거라고 달래고 달랬다. 아들은 내가 왜 병이 심해지고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줄 그제야 알겠다고 말했다. 아들은 여러 차례 아빠의 전화를 받은 뒤 나의 상태가 더 나빠져 다음날 응급실로 실려간 적을, 직접 싣고 간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내고는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후부터 아들은, 엄마 그늘 아래 있던 어린 아들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 앞장서서 나를 끌어주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아들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한 시점이었다.


Enough is enough. 


이제 엄마는 충분하다고 아들은 말했다. 이제부터는 엄마는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만 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아들은 절대로 엄마를 아빠에게, 한국으로 보내지 못한다고 했고 도와주겠다는 그런 생각조차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이제는 자신이 엄마를 지키고 돌보겠다고 했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 가장이면서도 지금까지 자신의 아내에게, 한 아이의 엄마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그 사람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들은 엄마는 아빠에게도 그만하면 충분하고도 넘치니 그만 나의 관계를 접으라고 했다. 나에게 평생 도움을 준 적도 없지만 앞으로도 도움되지도 않는 사람이고 있으면 엄마 병만 깊어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 말에 이혼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 후 여러 차례 신뢰가 깨졌음에, 기다림을 접으면서 나의 건강이라도 지키자고 내린 최후의 결정이었다.


라디의 노래 '엄마'

그런 일이 있은 뒤 한동안 아들은 엄마의 이름 속에 아픔과 안쓰러움 그리고 미안함으로 자책하며 아파했다. 엄마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자란 자신이 너무 밉고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를 진즉에 도와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 가슴이 너무 아프다고 자책했다. 어느 날 아들은 자신의 마음을 꼭 담은 한국 노래를 찾았다고 들려주며 아들이 나를 안아주며 또 울었다.


Ra.D - 엄마

처음 당신을 만났죠 만나자마자 울었죠

기뻐서 그랬는지 슬퍼서 그랬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드릴 것이 없었기에 그저 받기만 했죠.

그러고도 그땐 고마움을 몰랐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왔네요.


엄마 이름만 불러도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죠

모든 걸 주고 더 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당신께 나 무엇을 드려야 할지


엄마 나의 어머니 왜 이렇게 눈물이 나죠

가장 소중한 누구보다 아름다운 

당신은 나의 나의 어머니

.

.

처음 당신의 모습은 기억할 순 없지만

마지막 모습만은 죽는 날까지 기억하겠죠.

내 모든 맘 대해 사랑합니다.

.

.

당신은 나의 나의 어머니


아들의 자책을 돌려놔야 했다


나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동자와 얼굴에서는 항상 편안함과 사랑을 듬뿍 담고 있는 행복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한순간 아들의 눈동자와 얼굴에는 미안함으로 가려져 엄마를, 나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아들의 자책을 멈추어야 했고 나를 바라보는 아들의 시각을 바꿔줘야 했다.


우리는 많은 시간,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적부터 꺼내서 이야기하며 나는 단 한 번도 힘들고 고생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나는 그저 열심히 살았다고 했다. 아들도 엄마와 함께 열심히 살아주어 우리 둘은 정말 멋진 팀이었다고 말했다. 만약 내가 고생했고 힘들고 슬프다고 지난 시절을 말한다면 네가 이렇게 아프고 미안하게 생각하며 울어도 되지만 난 전혀 그럴 생각도 없고 그렇게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나랑 같이한 바로 너라고 했다. 우리 둘은 함께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다시 강조하며 달랬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아들은 눈물을 멈추었고 우리 둘은 항상 행복하게 잘 살았음을 인정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사랑 가득한 눈으로 행복하게 엄마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거기에 한걸음 나아가 무조건적으로 엄마를 응원하는, 엄마의 인생 찾기에 돌입한 아들이 되어버렸다. 나는 긍정적인 성격이기에 슬픔도, 어려움도 오래 지니지 않고 바로 인정하며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였기에 어둠과 무거움이 달라붙을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우며 자란 아들도 나를 닮아있어 대화가 통하고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감사했다. 



더 이상 기다림은 No No No


나의 큰 기다림 두 가지 중에서 하나는 완전히 실패했고 하나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러는 동안 나는 기다림으로 탈진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인생에서 더 이상 기다림은 원하지 않는다고 '기다림은 no no no'라고 자주 흥얼거리듯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자잘한 것부터 나는 기다리지 않으려고 습관을 들이며 나에게 맞춘 시간으로 언제든지 마음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다. 기다림은 오직 나의 발전을 위한 기다림만 존재할 뿐이라고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외치고 준비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생각대로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또 한 번 코로나로 느끼게 되었다. 한국에 방문하고 코로나에 묶여 노모와 가족들과 같이 있다 보니 그럴 수는 없는 상황에 또 빠져버렸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원하니 나를 먼저 생각하고 돌볼 수 있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딜레마에 빠져있다. 아들이 걱정한 부분이었고 한국 나오기 전 절대 한국에는 오래 머물지 말라고 아들이 신신당부했었다. 그래서 잠시 스쳐 지나가 듯 그렇게 한국을 들렀다가 외국으로 여행 다니려고 했었지만 코로나가 터짐으로 해서 세상은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고 언제든지 변수가 불쑥불쑥 나타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더 이상 기다림은 No No No라고 나만을 위해서 이제는 살아보려고, 살려고 하는데 자꾸 누군가를 위해서 살라고 하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걱정이다. 나의 길은 어디로 갈 것인지 54살에 나만의 인생을 살아보느냐 아니면 노모와 가족을 돕는 인생으로 남느냐의 문제가 가끔 나의 심장을 죄여 온다. 올해 안으로는 호주로 돌아가야 한다. 아들과의 약속이 그러했고 나의 휴가 기간이 그러하다. 더 이상 체류연장이 허락되지 않으면 더 일찍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다시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 보지만 매번 이 질문의 대답은 어렵고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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