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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Jan 31. 2021

악기 하나쯤은 해야 하나?

나는 포기, 아들은 성공

나는 악기에 관해서는 포기자였다.


나는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운 적 있다. 내 나이 때 피아노를 배운 것은 분명 부모님께서 주신 아주 특별한 특혜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거실에 영창 피아노가 떡하니 놓여있었고 며칠 후부터 나는 피아노 레슨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는 내가 왜 갑자기 피아노를 배우러 다녀야 하는지 몰랐고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 친구분의 부탁으로 피아노를 먼저 샀고 집에서 제일 어린 나에게만 피아노 레슨을 시켜 준 것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 레슨을 받게 되었다. 부모님이 시키니 레슨을 받았지만 나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바이엘만 배우고 피아노를 포기한 것을 스물이 넘어서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때 제대로 배우지 못했음에, 악기 하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함에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그때 어릴 적엔 어리석게 포기하고 말았다. 똑같은 곡을 몇 번씩 반복 연습해야 한다는 그 자체의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고 특히 손가락이 길고 예쁘서 피아노 치기에 딱 좋다고 하시던 선생님이 피아노 연습을 시키면서 자주 플라스틱 자를 세워 손등을 톡톡 때리는 것이 너무 아프고 싫었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님이 손등을 플라스틱 자로 때리지 않았고, 바이엘, 체르니, 하농, 바흐 이런 재미없는 순서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노래로 연습했었다면 취미생활로 어쩜 지금도 하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한국은 피아노를 하면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처럼 연습을 시키는 바람에 어릴 적 피아노를 생각하면 아픔이었고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후 다른 악기를 만져 본 적은 대학에 들어가서 친구에게 끌려 가야금 서클에 인원수 채우기 위해 끌고 간 적이 있었다. 끌려간 날 나는 가야금으로 아리랑 배웠고 꽤 괜찮게 연주를 첫날만에 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야금 배우며 아리랑을 한곡을 배웠을 뿐인데 첫날 두 손가락에 피멍이 크게 잡혔다. 집에 가서 쇠고기 붉은 살을 부치면 금방 좋아진다는 말을 들었지만 가야금 서클에 등록하지 않았다. 악기를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취미 생활로 두고 싶었지만 가야금도 손이 아팠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나에게서 악기는 점점 멀어졌고 나는 지금까지 악기 포기자가 되어 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서


그러다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악기에 대한 정보가 다시 들어왔다. 이때부터는 주인공이 내가 아닌 아들을 위한 생각을 해야 했다. 어릴 적 나에게 부모님께서 주신 그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나중에 깨닫고 후회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첫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되자 아들을 위한 선택을 해 보기로 했다. 사립 초등학교 1학년부터 진행하는 엑스트라 커리큘럼으로 바이올린 레슨이 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바이올린은 어려운 악기지만 피아노와 달리 악기 자체가 작아 아이가 들고 다니기에도 간편했고 가야금처럼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지 않으니 상처도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나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게 두 손을  다 쓸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아들의 좌뇌와 우뇌가 골고루 발달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고 싶어 학교에서 진행하는 엑스트라 커리큘럼을 선택했다.


이런 의도로 5살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시켰지만 가르치는 선생의 실수로 연습실 작은방에 홀로 선생을 기다리다 아들은 작은방에 대한 공포심이 커져 바이올린을 배우러 갈 수 없게 되어 포기했다. 역시 나의 피에는 악기는 없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들의 바이올린 재도전


공립초등학교로 2학년 때 전학 가서 3학년이 되자 아들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학교에서 뽑는 현악 부였고 레슨도 공짜였다. 아들이 한다고 하니 얼씨구나 싶어 바이올린을 사주며 공짜 레슨을 받게 했고 아들은 학교 현악부에 속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배우는 바이올린 소리는 듣는 엄마에게 일 년 정도의 인내심을 요구했다. 물론 배우는 아이도 쉽게 나오지 않는 소리에 힘들어했고 그럴수록 나는 아들에게 악보 읽는 법을 먼저 배우며 깨우치라고 설득하며 달래주었다. 그렇게 시작해서 일 년이 지나니 바이올린 소리도 나쁘지 않았고 그 후 아들은 9학년까지 7년을 동안 바이올린을 계속했다.


바이올린으로 월등히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떤 곡이든 읽을 수 있고 바이올린을 켤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할머니가 오면 신청곡을 받아 '대니보이'며 '메기의 추억'도 켜드리면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고 아들은 바이올린을 켜며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하지만 아들이 10학년이 되고 악기를 두 개를 하다 보니 취미로 하는 악기에 시간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특히 8월에 있는 Gold Coast Eisteddfod에서 학교별 대항 음악, 예술 콘서트 대회 때는 픽업해주며 따라다니다 보니 엄마인 나도 힘들었지만 악기를 두 개씩이나 하는 아들은 더욱 힘들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10학년에는 악기 둘 중 하나만 하는 것이 어떤지 물었다. 아들도 나와 같은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며 바이올린을 포기하고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겠다며 미련 없이 바이올린을 포기하고 색소폰을 선택했다.



색소폰


아들은 목관악기 색소폰을 초등 5학년 때 시작해서 지금까지 색소폰을 취미로 즐기고 있다.


8학년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밴드부 총 담당 선생인 미스터 브케논을 만난 후부터 아들은 색소폰 실력을 체계적으로 키워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브케논 선생님은 아들에게 처음에는 모욕감을 주었다.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색소폰을 시작했으나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 받는 공짜 레슨 외에는 레슨을 따로 받지도 등급 시험도 치지 않았다. 여러 차례 재능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우린 취미생활에 크게 돈 들여 레슨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아들도 혼자서 실력을 키워 엄마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 주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5,6,7학년을 보내고 8학년이 되어 뮤직 엑설런스 반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가 보니 미스터 브케논은 등급을 확인할 수 없는 아들을 콘서트 밴드부에서 색소폰 부문중 제일 아랫단계를 연주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단계는 아들에게는 너무 쉬웠고 심지어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과소평가에 모욕감과 실망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해부터 브케논 선생님의 권유로 아들은 색소폰 시험 3등급과 5등급을 치면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치러내면서 High Distinction (A+)을 받은 것이었다. 미스터 브케논은 3등급을 혼자 치러서 설마 했다고 했다. 그런데 5등급까지 혼자 해내는 모습에 무척 놀랬다며 아들의 실력을 인정해 주었다. 솔직히 모르면 무식하다고 했던가, 우리는 몰랐었다. 등급 시험을 하기 위해서 레슨을 받고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냥 주어진 곳을 연습하고 공부하면 되는 줄 알았고 그렇게 치른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들은 일 년 만인 9학년부터는 밴드부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파트만을 맡게 되었다.


아들이 11학년을 마칠 쯤에 미스터 브케논은 마지막 12학년을 앞둔 아들에게 협박 비슷한 당부의 말을 하며 학교 밴드부를 그만두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아들은 색소폰에 재능이 있어도 색소폰으로 욕심내지도 않았을뿐더러 전교 일등만 하는 아이라 미스터 브케논은 지레짐작해서 아들을 어르고 달래려 했던 것이었다. 아들도 고3이라는 중압감에 잠시 고민을 하기는 했다. 그래서 나의 의견을 물어왔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색소폰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삶에서도 중요한 부분으로 차지했고 거기서 얻는 즐거움을 알아버렸기에 고3이 되어서도 밴드부를 포기하지 않았기로 했다. 중요한 하나를 위해 뭔가를 포기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좀 더 노력해서 같이 이뤄가는 삶을 아들은 선택을 하고 살겠다고 했다. 그래서 12학년이면서도 빅밴드 경연대회로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일주일 다녀왔으며 아들은 거기서 특별상까지 받았다. 그리고 졸업 전까지 색소폰 8등급의 시험도 무사히 통과하며 대학 전공자가 아닌 단계에서 갈 수 있는 최고 등급까지 성취한 것이었다.


12학년 어느 날 아들과 내가 한 대화는 이랬다.

 "아들, 나는 네가 색소폰으로 대학을 가서 색소폰 연주자가 되겠다 해도 난 좋아.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했고, "엄마 항상 그랬듯이 색소폰은 취미로만 할래요. 색소폰만 하는 인생은 나에게는 좀 심심할 것 같아요"가 아들의 대답이었다.




아들의 세 번째 악기


악기를 하나 연주하다 보면 첫 번째 악기에는 배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가지 악기를 배우고 나면 다음 악기를 배우는 데는 첫 번째 악기 때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듯했다. 악기가 현악기에서 관악기로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아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었다. 바이올린은 더디게 배워졌지만 색소폰은 거의 하자마자 소리를 좋게 내며 혼자 배우기 시작했고 아들이 하는 세 번째 악기 기타도 코드 몇 개를 외우고는 혼자 배우며 노래를 연습해서 처음 아들이 기타로 불러준 노래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아들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  'Fall for you'였다.



살면서 악기 하나쯤은 해야 하나?


아이가 악기에 관심을 보일 경우 그 악기로 정해서 시키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부모가 악기를 선택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악기를 배우는 아이에게 큰 기대는 하지 말자. 악기를 즐기며 아이의 취미 활동이 될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악기를 하나 시키면서 악기로 대학 가고 성공하길 바란다면 과유불급이다. 아이의 취미가 되어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배울 때 부모는 함께 응원하며 즐겨 주어야 한다. 아이가 배워오면 아이에게 배워 볼 수도 있다. 나는 여러 가지를 아들에게 배웠다. 체스, 바이올린과 색소폰, 심지어는 해부학과 의학 원리까지 아들을 통해 자주 듣고 배운 적이 있었다. 물론 나에게 남아 할 수 있는 것은 체스뿐이고 나머지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이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가르침으로서 배움의 이해력과 기억력이 깊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 알려 준 나를 대학교까지 이용했었다.


어떤 부모들은 직접 자신이 모두 배워 아이를 가르치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그런 열정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아이와 어른은 배움의 습득과 축적 방법이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모로서 나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며 바른 매너를 가르치는 역할과 아이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 들어주고 상담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외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모든 것은 그 분야 전문가들에게 직접 맡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사교육, 과외를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최대한 학교 교육을 이용했지만 한국 교육과는 다를 수 있으니 학교에서 악기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악기 하나 정도는 취미로 가르치는 전문가에게 시켜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조심스러운 제안을 해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요즘 유튜브도 좋지 않나 싶다. 아이와 함께 유튜브를 보며 악기를 같이 배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나는 어릴 적 부모님이 주신 기회를 날려버린 악기 포기자였지만 어른이 되고 오십도 넘은 지금에 와서 다시 악기를 배워볼까 살펴보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악기를 하나 배우면 나의 취미 생활에 다양성을 줄 수 있어 좋을 것 같고 나이 들어 악기를 하나 배워보는 도전도 나쁠 것 같지 않고 죽기 전에 연주할 수 있는 악기 하나쯤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나의 어릴 적 기억부터 아들 이야기까지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진 것이다.




12학년(고3) 때


당신들의 생각은 어떤가?
악기 하나쯤은 하길 원하는가?
자식에게 악기를 권해 볼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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