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saengwriting Mar 22. 2021

호주 의대 입학

아들의 경제적 독립 시작



12학년 졸업을 하고 나면


호주에는 고등학교 졸업생 전통인 Schoolies Week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호주 유명 관광지역으로 부모님들의 지원을 받아 여행 와서 친구들과 일주일 정도 먹고, 마시고, 놀며 파티를 하는 전통이었다. 스쿨리스는 각 주에 따라 졸업시기가 다르기에 2주 정도 진행이 되고 스쿨리스 주간에는 동네가 떠들썩하게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이 생겨나고 뉴스에도 매일 스쿨리스들의 행보가 방송된다. 우리가 사는 골드코스트 서퍼스 지역은 해마다 많은 스쿨리스들이 즐겨 찾는 지역이다. 하지만 아들은 스쿨리스를 선택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한국으로 3주 여행을 떠나기로 이미 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스쿨리스 기간보다 길게 여행을 갔다가 호주로 돌아온 아들은 대학교 신청서 QTAC과 대학교들의 장학금을 살펴보고 거기에 필요한 서류들을 슬슬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입학 신청 QTAC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호주 퀸스랜드 주에서만 하는 OP 점수가 나와야 했다. 지금은 교육법이 바뀌어 더 이상 쓰지 않지만 아들 때에는 사용했었다. OP 점수는 대학 입학시험 점수와 11학년과 12학년 때의 학교 성적과 등급과 내신을 모두 합쳐 OP등급으로 환산해서 점수를 내며, OP 등급으로는 1-25등급까지 분류되어있고 OP 1등급이 가장 높은 점수이고 대학교 입학에 가장 좋은 등급 점수였다.


1월 10일 전쯤에 아이들 성적이 나왔다. 성적이 나오기 시작하자 한동안 아들의 핸드폰은 친구들의 전화로 불이 났었다. 몇몇 아이들은 성적에 실망한 전화를, 몇몇 아이들은 진로에 대한 상의를 해 왔다. 그해 아들이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최고 성적인 OP 1등급을 아들 혼자만 받았다. 그 당시 아들 외에도 3-4명 정도는 더 받을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그러지 못해 아이들은 물론이었고 학교도 술렁였다. 그러다 차츰 안정을 찾고 아들 친구들도, 아들도 서로 상의하며 QTAC를 완성해서 신청했고 어떤 아이들은 GAP Year를 가지며 일이 년 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여행, 체험, 봉사 등으로 다시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결정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대학교 입학 신청 (QTAC)

 아들의 목표는 의대였기에 QTAC 1순위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있는 의대로 적어 넣었다. QTAC시스템은 6군데 대학교 전공을 들어가고 싶어 하는 순서를 정해서 6군데를 넣어야 했고 1순위에 가장 들어가고 싶고 원하는 대학교와 전공을 적어 넣어야 했다. 아들이 정한 1순위 대학교 의대는 다른 대학교 의대와는 기간도 1년 짧고 본과 의대 입학이 보장되어 들어가는 특별한 대학교이고, 호주 상위 2프로만 들어가는 곳이었기에 혹시나 입학 허가가 되지 않았을 경우를 생각하니 2순위와 3순위를 결정할 때는 무척 고민되어 아들과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신중을 기했다. 2, 3순위라는 것이 애매해서 대학교 입장에서는 기분이 살짝 나쁠 수 있기 때문에 1순위로 자기 대학교를 적은 학생을 먼저 뽑아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겨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심 끝에 골고루 퀸스랜드에 있는 의대로 6군데 모두 채워 넣었다.



장학금 신청


QTAC을 끝내자 대학교 장학금도 알아보며 신청을 시작했다. 호주에서는 장학금 신청에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 줄은 아들이 장학금 신청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자기소개서는 물론이고 학교 성적뿐만이 아니라 아들이 고등학교까지 한 모든 것들의 기록을, 증거 자료를, 자원봉사 및 사회활동 행사의 기록들이 있어야 했고 2-3명의 인지도 있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의 추천서를 받아 함께 첨부해야 했고 그들의 연락처까지 적어내야 했다. 아들의 추천서를 써준 두 분 중 한 분인 로터리 클럽 회장님은 그 당시 싱가포르에 있었는데 대학교 측에서 연락을 해 왔다고 했다. 이 분과의 인연은 아들이 11학년 때 호주 전국 사이언스 포럼에 학교별 몇몇 학생들이 추천되었지만 아들이 골드코스트 지역 대표로 뽑혔고 로터리 클럽에서 전액 스폰서를 받아서 다녀온 것으로 로터리 클럽 회장님이 아들과 나를 정기 미팅에도 자주 초대해주시며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의대는 학비 장학금에서 제외


장학금을 신청하면서 호주 모든 대학교에서 의대는 학비 장학금에서 제외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학비 장학금을 위해서 장학금 신청을 하려 했었던 것인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기운이 빠졌다. 그래도 아들은 학비 장학금 신청은 불가능했지만 찾아보니 학비 말고도 몇 가지 장학금을 신청할 수 있다며 마지막까지 열심히 서류를 마련해서 넣었다. 그런 아들을 지켜보다 장학금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들은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며 신청했다.



대학교 합격과 장학금을 받았다.


다행히 아들은 1순위로 신청한 대학교에서 입학 허락과 함께 입학 수락하면 장학금 2만 5천 불을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몇 군데 다른 대학교에서도 아들의 입학을 허락한다는 통지를 받았지만 아들은 1순위 대학교에 가겠다고 통보했다. 대학교가 결정이 된 후 어느 날 아들이 아르바이트하던 중에 대학교 측에서 한통의 연락을 더 받았다. 대학교에서 Deans Sir Samuel Griffith Schlarship: maximum value of $60,000을, 해마다 대학교 입학생 중 최고의 성적을 가진 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을, 아들이 받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학금이야 받으면 땡큐 아니어도 괜찮다 포기했었기에 그래서 입학 수락에 주어진 장학금 금액만으로도 너무 기뻤는데 이 소식을 받은 아들은 너무 놀라 제일 먼저 나에게 연락을 해 주었다. 그때까지도 아들은 이 소식이 믿기 어렵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집에 와서 아들은 메일로 다시 확인했고 이날 우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축하 파티를 열었다. 아들이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호주에서 상위 2프로가 들어가는 곳에서 최우수 성적 장학금을 받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고 기뻤다. 이 장학금은 아들이 대학 다니는 동안 3개월에 한 번씩 6 천불씩 통장으로 들어와서 아들은 대학생활을 하면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다닐 수 있는 기반이 확보된 셈이었다.



대학교 공부


아들은 대학교 과정은 2년 동안 6학기를 공부하는 다른 대학교의 3년짜리를 2년으로 몰아넣어 집중 공부시킨다고 보면 되었다. 그리고 학점 6점 이하를 받아 졸업하는 학생은 미래 의사가 된 후 어느 날 정부의 부름을 받으면 언제든지 지방으로 가서 2년간 근무를 해야 한다는 조건도 입학 동의서에 있었다. 호주에서의 대학교 학점은 D7(85점 이상 백분율 환산) , D6(75점 이상 백분율 환산), C5(65점 이상 백분율 환산) , P4(50점 이상 백분율 환산) , Fail 0점 (50점 이하 백분율 환산)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점 7.0만 점(100점 만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아들은 대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 새로운 공부라 좋아하며 열심히 해서 학점 7을 모두 받았다.


아들은 대학에 들어가서 배우는 공부는 전혀 몰랐던 영역을 새롭게 배우는 거라 어렵지만 즐거워했다. 그래서 언제나 활기차 있었고 열심히여서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안심이 되었다. 처음 일 년 아들이 대학교 공부를 하면서 나는 아들의 공부에 도우미로 동원되어 의학 용어를 외우기도 했고, 화이트보드에 아들이 뼈의, 혈관의, 장기 의학 이론을 설명하면 들어주고 질문지의 질문하는 역할을 하며 아들 공부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의대 공부를 배운 적도 없는 내가 의학용어들이 하나둘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가끔씩 아들도 놀라게 하는 예리한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선무당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을 혼자 떠올리며 웃기도 했다.


아들의 경제적 독립 선언

아들은 12학년을 마치고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며 스스로 성인으로 독립하는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과외 알바로 돈을 벌기 시작하다 보니 아들은 돈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대학 입학하면 따라오는 여러 가지 비용 등을 계산해보면서 아들은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기에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어느 날 아들은 스스로 경제적인 독립을 자처하며 선언했다.


아들은 아랫 학년을 가르치는 과외 알바를 12학년이 마치고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졸업도 하기 전부터 아랫 학년들에게 과외 문의가 들어왔다. 첫 과외 학생은 바로 아랫 학년으로 학생회장이 된 호주 아이와 그의 엄마가 먼저 상담 및 과외를 부탁해왔다. 그래서 아들의 첫 과외 알바가 이렇게 시작되었고 아들의 과외는 학교 선생님들도 놀랄 정도로 많은 학부모들이 아들 핸드폰 번호를 요구하며 원했지만 나의 중재로 아들은 2-3명만 가르쳤다. 많은 아이들이 과외를 원했지만 고3 가르치는 알바는 이동거리의 시간낭비가 컸기에 대학 일 년 동안만 하고 그만두었다. 나는 아들이 공부에 무리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아르바이트하기를 원했고 아들도 동의했다. 아들은 꾸준히 알바를 찾아서 했으며 대학교 2학년 때부터는 대학교 일 년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을 대학교에 직접 채용되어했고, 의대 본과 졸업까지 후배들에게 해부학을 가르치는 일을 대학교에 채용되어 도맡아 했다. 마지막 해부학 가르치는 알바는 시간당 120불씩 받는 비싼 일이었다고 기억된다. 그 외 의대와 관련되어 가르치는 일 외에도 아들은 카지노 호텔 영화관에서 주말에만 2년간 일을 하면서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도 교류를 했다. 이렇게 아들은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대학교 내내 알바를 하며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을 추구했다. 나는 그런 아들이 아주 기특했다.



나는 생각한다.


아들의 경제적인 독립 시작을 지켜보며 고등학교를 마친 그 시기에 부모들은 아이와 많은 대화를 하며 앞으로 나아갈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며 지지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자가 아니어서 미안하지만 다행이라 했다. 그래서 아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했다. 부자가 아니었지만 주변과 나눔을 실천하며 행복을 알았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가까이 함으로써 사람 보는 법을 알게 했고, 스스로 노력하고 배움으로써 나아간다는 것도 알려주었고, 좋은 차를 사주지는 않았지만 운전하는 법과 방어 운전법을 가르쳐주며 교통사고로 헛되이 목숨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려주었고, 힘들고 어려움이 생겼을 때도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바른 해결책을 생각하며 스스로 노력하며 책임지는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줬고,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제라는 것도, 신념을 따라가지 돈을 따라 움직이지 말라는 것도 알려 줄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좋은 음식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좋은 재료 사는 법과 만드는 나만의 요리법도 가르쳐주며 집밥의 중요성도 깨닫게 해 주었고, 육체노동의 아름다움은 키우고 돌보는 행동으로 저절로 보고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게 하면서 보고 배우며 함께 자라온 아들은 우리가 지켜내고 싶은 것을 집안 내력, 전통으로 이어가자고 스스로 말하며 지켜주었다.


아들이 커서도 지금까지 우리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다. 만약 내가 죽기 전에 재산이 남는다면 나는 내 아들과 그의 자손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지구 환경과 각종 질병 연구재단에 조금이라도 기부하고 죽는 인생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쓸만한 장기는 모두 기부해 달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나는 아들에게 모두 이야기를 하고 아들도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이야기한다. 그래서 가족에게 있어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벚꽃의 속삭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