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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aengwriting Nov 04. 2020

 호주에 살래? 한국에 살래?

세 번째 이야기  봄봄봄봄 봄이 왔어요.

29년 만에 한국의 봄


그전 한국 방문 때는 주로 호주 방학 기간이었기에 한국의 여름이나 겨울만 보고 호주로 돌아갔었다. 그래서 이번 나의 긴 휴가 기간에는 그동안 보지 못한 한국의 봄과 가을을 꼭 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한국에 봄이 왔다. 1월 18일에 도착해서 호주보다 추운 한국 겨울나기가 힘들었던 만큼 나는 봄소식이 반가웠다. 29년 만에 처음 만날 봄을 생각하니 마음이 먼저 설레었다. 이월 말쯤 코로나는 한국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고 그동안 한국에 도착해서 집 청소며 정리로 꼼짝 하지 않았던 나는 날씨가 좀 풀리자 코로나를 피해, 사람들을 피해  봄을 맞는 산으로, 들로 큰언니와 함께 엄마와 이모를 모시고 일일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었다.

 

봄나물 캐러 다니자


2월 말쯤 햇살 따뜻한 어느 날 우리는 드라이브를 갔었고 여기저기 시골길을 찾아다니며 봄소식을 찾으며 천천히 차로 다니고 있었다. "쑥이 벌써 올라왔네. 저기는 햇살이 좋으니 통통하다. 잠깐 세워봐라" 갑자기 엄마가 차를 멈추게 했었다. 차를 세우자 엄마는 그쪽으로 걸어가서는 불편한 무릎으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며 몸을 낮추시더니 쑥을 뜯기 시작하셨다. 큰언니도 차에서 내려 엄마와 함께 쑥을 뜯기 시작했고 나와 이모는 차 안에서 그들이 오길 기다렸다. 그때까지 햇살은 좋았지만 날씨는 꽤 쌀쌀했기에 추위 많이 타는 나와 이모는 햇살 가득 품은 차 안이 더 좋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돌아온 두 사람 손에는 한가득 쑥이 들려 있었고, 엄마는 차에 타자마자 차 안에서 기다린 내가 못 마땅한지 따뜻한 호주에서 온 사람이라 추위 많이 탄다고 놀리시듯 성질을, 앙탈을 부리셨다. 아마 쑥 한주먹 보태지 않고 차에서 마냥 기다린 나에게 심술이 좀 나신 모양이었다. 엄마와 큰언니 손에 가득 담겨온 쑥으로도 네 사람 먹을 쑥국을 끓이고도 남아 보이는데 노인네 투정이 귀여워 보였다.


다음날 아침 방으로 솔솔 풍기는 된장국 냄새에 부엌으로 나갔다. 엄마가 쑥국을 끓이고 계셨고 부엌으로 들어온 나를 보자 엄마는 간을 보라며 작은 접시에 쑥국은 담아 주셨다. 29년 만에 봄을 맞았으니 쑥국은 얼마만인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첫맛은 그냥 맛있는 엄마표 된장국이었고 음미를 하고 다시 먹어보니 풀향이, 쑥향이 살짝 느껴졌었다. 아직 어린 쑥이라 향이 짙지 않다는 엄마의 아쉬운 소리로 이해가 됐고 그날 아침 처음으로 한국의 봄을 맛본 식사 시간을 가졌다.


"맛있제? 맛있제? 여기다 냉이도 함께 넣으면 좋은데"

"쑥은 찹쌀로 쑥떡을 하면 더 맛있다"

그날 아침 밥상에 올려진 첫 쑥국을 먹으며 들었던 엄마의 말들은 봄나물들의 예찬이었고, 쑥에 대한 이야기여서 아침상에 올려진 쑥국의 향기가 엄마의 이야기로 점차 짙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식사를 마치며 차 한잔 마시는 동안 엄마는 불쑥 쑥과 봄나물을 캐러 다녀보자는 제안을 하셨고 우리는 즉흥적으로 '쇠뿔도 당김에 빼라'는 말을 실천하듯 그다음 날로 도시락을 싸서 아침 일찍 시골로 드라이브하며 봄나물을 찾아다녔었다.


제사보다 젯밥


나는 봄나물은 전혀 모르지만 들꽃, 풀꽃이 좋다고 그래서 합류한다고 밝혔다. 봄나물은 엄마와 큰언니만 캐도 충분하니 난 가르쳐 주면 나물도 조금 채취하겠지만 다니면서 풀꽃들을 더 많이 보고 살피겠다고 했었다. 그렇게 하라는 허락을 받고 우리는 여행을 시작했고 엄마와 언니도 차츰 나에게 많은 풀꽃들을 보여주려 애쓰셨다.


" 희선아! 여기 니가 좋아하는 꽃 있다. 와서 사진 찍어라"

"희선아 여기도, 이런 풀꽃은 나도 처음 본다."

"이것도 예쁘네, 희선아"

"희선아 여기 꽃"

이름 모르는 풀꽃


산에 도전하다


여기서는 등장인물 대한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에 대한 설명이다.

팔 학년 사반 엄마 마음은 삼십대지만 양쪽 무릎 수술 다 받으신 분이고, 칠 학년 이모는 시각 장애와 어릴 적부터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신 분이시다. 육 학년 일반 큰언니는 갱년기 증상을 온몸으로 받고 있으며 갑자기 불어난 몸무게로 힘들어하고 있고 나는 마음 건강하지만 한국을 잘 모르는 오십 대이다.


우리들은 한 달 넘게 봄나물 캐러 돌아다녔었고 그러던 사월 중순쯤 산초잎을 뜯는 시기라며 초대해 주신 지인 시골집 앞산을 가게 되었다. 평평하고 넓은 들을 다닐 때는 괜찮았지만 산행에는 많은 장애가 있었다. 엄마는 7년 전 양쪽 무릎 수술을 받으신 후로는 한 번도 산에 오른 적이 없었다고 했고 모두가 산행은 힘들거라 생각했었고 산행은 우리 모두에게 힘들었다. 지인이 사는 집 바로 앞산이라 개인 선산일 거라는 짐작이 됐고 그래서인지 산행을 위한 길도 제대로 없었다. 그래서 겨우겨우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을 찾으며 산을 올랐다. 산에서도 내 이름은 엄마로부터 수차레 불러졌다.


"희선아! 저기 나무 아래 취나물 굵다"

"희선아! 산초나무엔 가시 있다 조심해라"

"희선아 여기 풀꽃 좀 봐라."


산을 오르자 우리는 산이 험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우는 둘씩 짝을 지었고 엄마와 나는 짝이 되어 같이 산을 올랐다. 엄마와 같이 산을 오르고 내릴 때 길이 험해 노모를 밀고 당기며 잡아주며 산행 내내 같이 그러다 보니 더욱더 엄마는 나를 의존했고 심심찮게 나의 이름을 부르셨다. 산이 험하고 연세가 있으시니 나도 자주 엄마를 살피며 괜찮은지를 묻게 되었었다. 하지만 힘은 드셔도 산초잎을 딸 수 있다는, 따 보다는 기대에, 봄나물을 캔다는 즐거움에 힘들어도 괜찮다 하시는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엔 포기는 보이지 않았고 행복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엄마가 덜 힘들게 산을 오를 수 있도록 많이 끌어주고 밀어주게 되었었다.


우리는 다행히도 지인이 말했던 산초나무 군락지를 발견했고 거기서는 각자 알아서 산초잎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산에 오르고 처음으로 각개 활동을 떨어져 했었지만 우리는 누가 어디쯤 있는지 보지 않고도 알 수가 있었다. 산초나무에는 단단한 가시가 많았고 산초잎을 따면서, 옆으로 지나가면서 가시에  찔려 작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고 찔린 이의 얼굴에는 아픔과 듣는 이에게는 웃음을 함께 선사해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목적지인 산초나무 군락지가 내가 걱정했던 것보다는 높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산초잎을 꺾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어느새 서늘해진 느낌을 '받고 하산을 서둘렀다. '산에서 맞는 해 떨어짐은 빠르다'라고 하산을 재촉하는 엄마의 말씀도 있었기에 우리는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올라갈 적 보다 내려가는 산행이 더욱 힘들었다고 다 내려와서는 서로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얼굴들을 살피며 마주 보며 웃었다. 이번이 아마도 엄마와 함께하는 마지막 산행일 것 같아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이 서운해졌다.


난생처음 풀독이 오르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잠시 길을 잃었고 여기저기 사람 발자국으로 만들어진 길을 찾으려 앞장서서 걸으며 먼저 헤집고 다녔었다. 그렇게 찾아 우리는 무사히 산을 내려왔고 집에 와 씻으며 보니 양쪽 발목에 잘잘한 물집들이 손바닥 넓이로 크게 퍼져 발갛게 붓고 간지러웠다. 풀독이 올랐다고 했다. 난생처음 나는 풀독이 뭔지를 겪게 되었고 물집들이 심하게 보여 병원을 찾았고 처방된 약을 먹고 바르며 풀독이 다행히 잘 가라앉았지만 흉터는 오돌토돌한 피부로 검게 남아 오랫동안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나의 풀독을 끝으로, 힘겨웠던 산행을 끝으로 우리의 봄나물 채취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동안 어지간히 많이 봄나들이와 봄나물 채취를 했기에 그 시점에 그만둘 때도 되었었다. 풀독이 오른 뒤로 풀이 피부에 닿으면 붉어지고 가려움증이 생긴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리라 본다.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산과 들을 다닐 때 종종 떠올리며 불렀던 노래였다.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다리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노래의 시작은 기억하지 못한 체 이 두 소절만 계속 흥얼거리며 봄나물을 채취하며 돌아다녔었다.


쑥, 기쑥,  달래 , 냉이, 씀바귀, 취나물, 곰취, 고들빼기, 민들레, 채깨미(부찌깽이)



시골로 다니다 보니 시골 장날을 많이 구경하게 되었었다. 한국에서는 봄에 피어나는 풀들은 모조리 먹는 듯, 못 먹고 안 먹는 풀이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봄나물들이 시골 장에 나왔었다. 심지어 한국에서 84년 사신 엄마조차도 모르는 이름의 나물들을 너무 많아서 할머니들에게 이름을 물어보며 시골장을 돌아다녔었다. 우리는 엄마가 정확히 아는 봄나물들만 채취하며 들로 다녔다. 어릴 적 엄마는 다양하게 음식을 해 주셨지만 나는 어려서 그랬는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먹기에만 바빴던 모양이었다. 나이가 오십이 넘어도 봄나물 이름이며 모양조차 전혀 몰랐던 내가 이번 기회에 많은 봄나물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고 채취까지 하게 되어 좋았었다. 마지막에 풀독이 올라 고생한 것 빼고는 이번 엄마와 가족들이 함께한 이 시간들은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봄나물은 신기했다. 나물을 찾고 채취하며 돌아다니는 시간은 가는 줄 모르게 쓱쓱 지나가니 재미있었고, 다음날 캐온 나물들을 다듬고 씻는 일은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는 오직 단순 노동이었고, 씻어둔 나물들이 하나씩 음식이 되어 밥상에 오르면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그래서 3월 4월 두 달 동안 일주일에 한두 번씩 나물을 캐러 다니고 또 다녔었다.


완벽한 체험으로 완성된 나의 한국 봄


나의 2020년 한국의 봄은 온몸으로 배우며 느낄 수 있었던 내 인생에 완벽한 첫봄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을 다 이용해서 경험한 힘들고도 즐거운 봄이었다. 한국의 봄을 이렇게 완벽하게 느껴본 적이 나는 처음이었고 심지어 엄마까지도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처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의 봄을 완벽하게 즐겼다. 이런 기회를 특히 84세 엄마와 가족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값진 선물이고 나의 휴가 목표 중 한 가지는 성공 한셈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한국의 봄은 노동을 부르는 계절이라 말하고 싶다. 직접 산으로, 들로 부르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봄이지 가만히 집에 앉아서 얻어지는 계절은 아닌 것 같다. 봄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고 그래서 움직이게 만든다. 봄꽃을 보라고, 봄나물을 채취하라며 사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을 가진 계절이 봄인 것 같다.


이렇게 봄을 즐기면서 나는 '내가 전원생활, 시골 생활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가끔 해 보았다. '좀 더 나이가 들면 바다가 앞에 있는 작은 시골에, 자그마한 텃밭을 만들어 채소 몇 가지 키우며, 바다도 가고 뒷산에도 올라가며,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동네 아이들 모아 그림을 가르치며 살면 어떻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이렇게 산과 들로 다니다 보니 그런 생각들이 문득문득 들었다. '과연 나와 어울릴까 '하는 물음표에 여전히 답을 내지 못하고 29년 만에 만난 나의 한국의 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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