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빠도 사랑만큼은 챙겼다
인도의 작열하는 태양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의 기운이 식고
어느새 살랑이는 바람이 잎사귀들의 회오리를 일으켜
거리를 살짝 부산하게 만드는, 어쩌면 한국의 초여름과 비슷한 풍경을 자아낼 무렵
10월에 우리는 대사관 '국경일 행사'에서 처음으로 마주했다. 운명처럼.
국경일은 역사적으로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한 날로
(영어로는 Reception: 초청인사를 받아들여 환영하며, 접객한다는 뜻이다)
각종 기념식과 경축 행사로 꾸며진다.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국경일 리셉션은 한-인도 수교관계를 기념하고
양국 간의 협력관계를 한층 더 다지는 외교적인 의미를 갖는다.
주재국 정부 인사, 한인도 기업단, 인도 내 한국 교민들
그리고 긴밀한 파트너십을 구축한 각 분야의 주요 인사들이 자리한다.
지난 7월 정상 행사에서 맺은 각별한 인연들로
올해 국경일 행사는 발 디딜 틈 없이 새로운 인물들로 그 분위기가 남달랐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드러낼 수 있는 모습으로 대사관 건물은 변모했다.
전통적으로 궁중 시대에 연회나 경사가 있을 때,
벼슬아치들이 고급 등롱으로 청사초롱을 썼다.
국경일은 밤 시간에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라 우리 또한 청사초롱으로 들어오는 길을 밝히며,
우리만의 스타일로 파티 시작을 알렸다.
밤 나들이가 시작되기 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숨을 돌리며 바라본 하늘은
이미 석양이 내리고 짙은 어둠이 깔린 아라비아 사막을 연상케 하는
분주한 행사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형형하며 고요한 풍경이었다.
대사관저의 안뜰에서 행사의 문을 열고
주인도한국문화원과 협력하여 전통무용 공연, 전통주 시음 그리고
잔치에 빠질 수 없는 한식 뷔페로 축제에 풍요로움을 더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의 역사는 새로 쓰였다.
지금의 남편과 운명 같은 첫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높은 밀도의 잦은 왕래가 이어지던 정상 행사에서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숨겨진 주역을 드디어 만나게 됐다.
동료 언니가 건장한 20대 청년 두 명을 양쪽에 호위무사처럼 대동하고
칵테일 한 잔을 들고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던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 난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금사빠라서가 아니다. 당연히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한 명은 인도 육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다비드상 외모에 말수 적고 근엄한 느낌의 전형적인 군인이었고
나의 그대는 정반대로 천진난만하고 정말 무해한 느낌의
살짝 미국 영화배우 벤 애플렉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강인한 인상을 지닌 공군 전투기 조종사였다.
애써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설레는 몸짓도 감추려 했다.
출중한 능력과 화려한 외모를 겸비한 내 또래의 남성분과
10분 이상을 마주하는 것은 단조로운 업무 일상에 아주 큰 파동이었다.
그날 밤의 낭만은 취기 오른 동료 언니를 데려다주는 것으로 예기치 않게 막을 내렸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번호도 알지 못한 채 놓쳐야만 했었다.
지나치는 열광이 아닌 진정한 사랑일 것 같은 마음의 확신만이 남았다.
복잡 미묘하지도 않았고 이건 단순 명료한 내 감정이었다.
나름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했다.
국경일 VIP 초청 인사 연락망을 샅샅이 뒤졌다.
단 숨에 찾아낸 그의 이름 옆, 여러 숫자들은 스쳐 지나가도 알 수 있는
영양가 없는 회사 소속 대표번호였을 뿐이다.
그리고는 두 달간 잊고 지냈다. 12월 중순, 재회하게 된 그날까지.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얻는 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를 찾으려고 했고 다시 어떻게든 만나보려고 했지만 닿지 못했던
상실감은 이를 곱씹을 새도 없이 11월 내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
또 한 번의 VIP 행사의 운이 깃들며 자연스레 상쇄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다시 인도를 찾았다.
국경일 행사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이전 스토리에서 밝힌 일 복이 터졌다는 실감이 당시 시들해지기도 전이었다.
수도에서 비행기로 두어 시간 떨어진 인도 북부의 Uttar Pradesh(우타르 푸라데시 州)로 갔다.
우타르 프라데시는 갠지스강 유역의 상중부 유역에 있는 지역으로
지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현재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인민당(BJP)이 집권하며,
인도 유권자들의 강력한 표심이 작용하는 정치적으로도 그 의미가 뚜렷한 요충지이기도 하다.
이번 인도 방문의 목적은 주재국 초청에 의한 것으로
무려 2천 년 전, 한-인도의 전설 같은 인연을 상징하는
인도 아요디아 왕국에서 온 삼국시기 가야의 왕비였던 "허황후 기념공원 착공식 참석"이었다.
한-인도 국제커플이 그것도 2천 년 전 가야에서 있었다니.
이 당시 행사 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놀라운 이야기였다.
찾아보면 가야의 김수로 왕이 인도인 허 공주를 왕후로 맞이한 여러 사료가 존재한다.
허왕후 기념공원은 그녀의 고향, Ayodhya(아요디아)에 지어졌다.
아요디아는 UP 주의 수도인 주도, Lucknow(러크나우)에서 두 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국빈급 방문 일정 본 행사는
인도 최대 명절 '빛이 어둠을 밝히고, 선이 악을 이기는'날을 기념하는 힌두교 축제
Diwali(디왈리)를 맞이해서 온갖 Diya(빛)를 밝히는 데 함께하는 것이었다.
인도 전역이 찬란한 빛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빛의 승리의 날로
서로에게 행복을 빌어주고 감사를 전하며 온정을 나누는 축복과 자유의 시간이다.
조금 더 우리 일상 가까이 느껴지는 디왈리를 즐기는 인도인들의 모습을 비춰본다.
한 가지 비화는 현재 폭죽놀이가 델리 주정부에 의해 법으로 금지됐다는 것.
디왈리에 터뜨리는 폭죽이나 기타 화학물질이 인도 전역을 통틀어
대기질이 최악인 델리 주의 공기 오염 주원인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행사 메인 숙소는 또 다른 인도 전통 브랜드 'Taj Lucknow' 호텔.
디왈리에 신명 난 인도 국민들의 염원은 정신없는 행사 속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인도의 전통 민속미술에 해당하는 Rangoli(랑골리)가 김정숙 여사를 산뜻하게 반겼다.
인도 남부 쪽에서 유래한 전통으로 여러 색깔의 석회가루, 색모래 및 꽃잎 등으로 낸 염료를 사용해
대문 앞이나 집안 거실 바닥에 세밀하게 채워 넣는 수작업 그림이다.
이번 행사는 이미 다수의 크고 작은 행사를 거친 나로서
훨씬 의연하고 수월하게 헤쳐나갈 수 있었다.
소위 말해서 나도 짬밥이 생긴 것이다.
왜 회사도 경력우대를 해주는지 이해가 되던 순간들.
큰 사고 없이 무난하게 잘 지나갔다.
동분서주하며 외교비품 챙기고 여사님 객실을 편한 동선에 맞춰 꾸미고
기미상궁처럼 모든 직원 식사를 직접 챙기며 산해진미를 맛보기도 했다.
"이보다 더 청경호를 자주 만나는 사람이 파란 지붕 밖에 더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쯤,
숙소팀 경호관님과 회포도 풀 수 있을 만큼 나의 행사 친밀도는 농익어 갔다.
인도 지방에서 본 행사를 치르고 있을 때,
남자친구가 되기 이전의 그는
델리에 있는 인도 대통령 궁에서 중령의 직위로 ADC* 직급을 맡고
여사님 카운터파트인 인도 영부인 보좌관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ADC는 군대의 고급 장교 비서 역할을 맡는 군인으로 'Aide-de-Camp'의 약어이다.
고위급 장군이나 제독 등 장성급 장교, 혹은 국가원수 및 왕족의 개인참모로서
일상적인 문제에서 상관의 경호원, 심복 또는 비서 역할을 하는 장교를 뜻한다.
그는 위에 명기된 역할 중에서도 인도의 특수성에 따라
국가의 군수통치권자이자 상징적 서명권자인 인도 대통령의 비서 업무를 맡았다.
일거수일투족에 그림자처럼 동원됐다. 덕분에 직접 만나지 못해도
시시각각 미디어를 통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가 싶었다.
행사 전후반으로 청와대 의전팀과 외교부 고위급 관계자를 이끌며
대통령 궁 투어와 양국 영부인 환영 오찬 일정에 진귀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영부인 단독 행사이다 보니
지난 정상 행사 때만큼의 수행단 규모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거대한 행사 경험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고위급 행사에 이제 지치는 기색 없이 적어도 허둥대지는 않고
균형 잡힌 일정 소화가 가능해졌다.
그래서 훗날 더 눈에 띄었던 그대의 행보.
사실 이 때는 연락도 안 하고 지냈던 터라
서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고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다.
인연이 되고 난 뒤부터 오히려 더 호기심을 갖고
우리 만남의 근간이 된 아름다운 과거의 흔적들을 되짚어 나간 것 같다.
나중에 교제를 하면서 우연히 듣게 된 그에 대한 끝없는
직장 상사와 동료들의 여담은 나에겐 모두 미담이었고
그는 뿌듯함으로 솟구친 내 어깨 뒤에 숨은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성왕리에 행사를 마치고 나 스스로에게 포상휴가를 선물했다.
신체적인 건강함과 정신적인 여유로움을 찾기 위해서 행사 후
2주간 유럽으로 훌쩍 떠났다.
인도 복귀 후에도 여느 날과 같이 잔잔한 일상이 지나고
12월, 외교부에 의한 외교부를 위한 외교인들의 행사로 외교 거장을 모시게 됐다.
올해의 마지막을 장식한 외교부 장관 행사.
그리하여 난 다시 정상 행사를 했던 7월의 '디 오베로이'로 돌아왔다.
호텔 직원들이 "미스 코리안 홍" 이 컴백했다며 무척이나 반겨줬다.
어쩌면 그들에게 난 대사님 보다 더 한국 대표 같은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민간외교가 그런 것이 아닌가. 외교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두 나라 간의 현안이나 현실적 목표에 앞서 그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는 국민들을
심리적으로 잇는 가교 역할말이다.
한나라의 문화와 전통의 이면을 일선에서 친근하게 알리는 소프트 외교를
내가 몸소 실천하고 있다는 사명감이 감돌았다. 소리 없는 환희와 함께.
사실 외교부 소속인 우리들의 우두머리가 왔으니
대단히 긴장하고 마음 졸이며 진행될 줄 알았던 외교부 장관 방문은
어미가 제 자식을 바라보고 따뜻하게 품으로 안듯이
오히려 여타 행사보다 더욱 순조롭게 또한 간결하게 끝이 났다.
일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건
인기 있는 로맨스코미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남들 얘기라고
픽션이라 가볍게 여기며 넘어간 적이 많았다.
한 해의 마지막까지 업무에 편향된 채 저무는 줄 알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짜릿한 서프라이즈가 찾아왔다.
국경일 지나고 두 달 만에 다시 그를 보게 된 것이다.
오히려 11월 영부인 행사 끝나고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난 그때 이미 유럽으로 출국한 뒤였다.
서로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며 헤어짐으로 끝날 줄 알았던
그 인연이 시나브로 닿아있었던 것이다.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반짝이는 그를 보며,
가슴이 벅차고 찢어지는 듯했다.
일시적인 열광이 아니라 그에 대한 총명한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내 지난날들이 보상받는 마법 같은 한 순간이었다.
바쁜 와중에도 난 잃지 않았다.
누군가를 알고자 하는 욕망,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하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반복적인 일상에 변주를 만드는 나의 도전적인 마음을.
누구보다 이타적이며 인간적인 미덕이 있는 그와 통했다.
매 순간 일과 사랑 모두에 헌신적이라는 점이 우린 참 닮아있다.
술을 못하는 나, 술을 잘하는 그
쓰고 독한 술도 같이 잔을 기울이는 찰나에
어떤 것보다 달콤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상호보완적인
찬란하고 아름다운 남녀의 관계로 넘어갔다.
그저 먼 동료일 수 있었던 그와.
나의 그에 대한 천착이 막연한 터널 끝, 빛을 보게 했다.
완벽했다. 그리고 2018년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막 시작된 사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빛이 어둠을 이기듯
밝은 빛으로 환화던 그의 대통령 궁 안에서
잠들 수 없는 깊은 밤,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들어온 서로를 위한 축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