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시간도 가치 있었다. 상봉 후 밀회.
그와 결별한 3월 초.
애틋하게 이별했던 그날 밤, 10대 시절 아이리버에 담아 두고 쉴 새 없이 재생 버튼을 눌러냈던
감성 짙은 노래, 딱 우리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테마인 포맨의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를 들으며,
그동안의 아름다운 시절을 회고하고 내면에 간직한 슬픔을 밤새 토해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내 상실의 날들은 속절없이 흘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리의 자욱한 대기오염과 쌀쌀함은 그 생명력을 다했으며,
따사로운 태양은 서서히 그 온기를 대지와 나누고 꽃을 피웠다.
나의 절망적인 이별 경험도 유한한 삶 속에 찾아오는 일상의 변주 앞에 무력했다.
신이 도운 건지 딱 이 시기에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을 털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정상행사에 대한 내 능력과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중대한 임무가 주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동남아 3개국 순방 소식이 들려왔다.
인도는 문 정부의 신남방정책, '아세안 국가와 미래공동체 발전 기반을 다지는 등의 외교적 지평 확대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의 격상'이라는 목표를 담은 국정과제 속 긴밀한 동맹국이자 요체이다.
2019년의 첫 해외순방으로 문 대통령은 '브루나이, 말레시아, 캄보디아'를 선택했다.
인도 밖에서 벌어지는 순방에 왜 내가 한 숟가락 얹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올해 첫 순방 준비의 숨은 주역들이 성공적인 정상행사 사례로 인도 방안을 레퍼런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난 인도에서 멀지 않은 브루나이로 부름을 받았다. 또다시 대통령 순방을 목도하게 됐다.
브루나이 VIP 행사 준비를 위해 항공권을 구매하고 짐을 싸고 있던 중,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진동이 울렸다.
뜬금없는 'How are you?'를 묻는 그의 안부인사였다.
순간 난 발신인을 다시 확인해야 할 만큼 믿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오다니.
더 멀리, 더 오래 아득하게 떠나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그이.
내 마음을 산산이 부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대답을 예상하면서
잘 지내냐고 묻는 건 무슨 감정인지 조차 나로서는 헤아릴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아는 그는 정말 단순히 물어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곧 여러 복잡한 생각을 밀어냈다.
그리고 나도 답장을 했다. 진부한 'I'm good. You?' (응 잘 지내, 넌 어떠니?)
대화는 나름 이어졌다.
가물거리는 기억이지만 당시 나의 해외 출장소식을 듣고 '혹시 도와줄 게 없을까?' 했던 것 같다.
보기 좋게 그의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이내 나는 그 손을 덥석 잡고야 말았다. 왜? 내 마음은 여전히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이니까.
모든 게 계획대로면 공관 차량으로 공항까지 이동했겠지만 공항 가는 길을 그와 동행했다.
오랜 날이 지나야 만날 것 같았던 사람을 우연히, 뜻밖의 만남으로 조우하게 됐다.
우리 둘은 냉정(Calm)을 찾은 상태였고 열정(Passion)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아서
그에게는 나에 대한 예의, 고별 후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상쇄하는 제스처.
나에게는 그에 대한 화답, 미지근한 미련과 나만의 애석한 담담함이 섞여 서로의 시간을 공유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출국장까지 데려다주고 헤어짐의 포옹을 나누고 이번엔 내가 과감 없이 작별을 고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브루나이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브루나이'라는 국가가 생소한 분들을 위해 아주 간결하게 적어본다.
이슬람 술탄이 통치하는 작은 왕국으로 보르네오 섬 북서 해안에 위치하며,
말레이사아가 가장 가까운 이웃국가이자 싱가포르 달러(SGD)가 통용되는 아시아 국가로
놀랍게도 동남아에서 세 번째로 큰 산유국에 해당한다. 수도는 반다르 스리 베가완이다.
오일 리치 국가답게 한 나라의 권한이 국왕에게 집중되는 나라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황금으로 에워싼 국왕이 거주하는 왕궁은 섬광 그 자체였다.
알라딘 왕자가 재스민 공주와 양탄자를 타고 등장할 것 같은 장면이었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1시간 정도 달려 임시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번 순방의 사무 공간은 꽤 화려했다. 국왕의 선처로 주요 행사 관계자 모두가 영빈관 건물에 짐을 풀고
이색적인 풍경 속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난 베테랑은 결코 아니었지만 아시아 순방의 모범 사례로 등장하는 인도 정상행사의 대표 격으로
주재국을 떠나 브루나이까지 차출된 만큼 두 어깨가 확고한 의지와 압박감으로 무거웠다.
반가운 얼굴도 하나둘씩 행사장으로 모여들었다. D-3 시점이었다.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이번에는 황금빛 도시 광경을 일반 관광객처럼 누릴 수 있는 자유시간도 쟁취했다.
아주 좁은 세상이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인도대사관에 취직하기 전 공무수행의 시작점이었던 필리핀 마닐라에 위치한 문체부 산하의
재외공관에 해당하는 주필리핀 한국문화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대학 졸업도 전인 내 사회생활의 초기에 한 때 업무를 함께했던 친했던 오빠를 브루나이 순방에서 만났다.
서남아태평양 국가 중 호주에서 멀지 않은 데 있는 남반구 국가 '파푸아뉴기니' 공관원 윤 씨였다.
오빠는 내 출장 소식을 알고 있었다지만 난 정작 출장단 구성원이 적혀있던 외교부 전문에서
그 이름을 슬쩍 보고 지나쳤을 뿐이었다. 인근 동남아국에서 여럿 오는구나 하고 말았다.
(브루나이 현지에 있는 공관규모는 매우 작아 여타 국가에 행사지원 인력을 요청했다.)
비슷한 길을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반갑고 소중한 인연들이다.
Hope our paths cross again in the future—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행사장 답사 및 주요 일정에 대한 정보 수집과 기록을 마치고
나는 이번에도 숙소팀에 배정돼 영빈관을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언제나 늠름한 가족 경호팀 분들과 익숙한 청와대 의전 식구들과
살뜰히 '그동안 잘 계셨냐고 생각보다 자주 뵌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격세지감을 느낄 새도 없이 정말 자주 마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번에 다시 나의 동경, 강 장관님을 뵀다. 언제 봐도 고상한 우아함이 매력적인 분이다.
브루나이 왕궁에서 문 대통령과 브루나이 국왕의 환담이 이루어졌다.
마블링 대리석 바닥, 수만 개의 크리스털 장식과 여러 진귀한 보석들이 영롱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왕궁 내부.
적잖이 놀랐다. 이보다 더 화려한 국유재산 거처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왕궁 곳곳의 화장실까지 그 럭셔리함은 영향력을 미쳤다. 기본 어메니티는 불가리 제품이었고 일반직원 휴게실에는 드롱기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었다. (내가 가장 애정했던 호사이기도 했다.)
이번 출장에서 난 플러스였지 알파가 아니어서 숨 가쁘게 바쁠 일은 없었다.
행사는 시간이 지나며 무탈하게 마무리됐고 주브루나이대사님이 차려주신 송별만찬에
공관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회포를 풀고 한국서 수행원단을 통해 건너온 몇 한국 식품도 조금 곁들였다.
섬나라인 만큼 바다, 강, 그리고 호수를 품은 브루나이의 자연경관은 아주 빼어나다.
광활하게 펼쳐진 브루나이의 보물로 불리는 안두키 호수와 야자수가 빼곡히 늘어선 울창한 밀림이 선사하는 주변의 문화유산과 신비로운 조화를 이루는 경치 속에서 우리는 평온함을 만끽했다.
고된 업무 끝에 찾아오는 우리 모두가 고대했던 그 고요함을.
인도 복귀 하루 전, 브루나이 럭셔리 7성급 리조트에서 호캉스를 즐겼다.
The Empire Brunei 리조트, 호화로운 장식과 따뜻한 열대지방 특유의 풍경이 매력적인 최고급 호텔이다.
대리석 바닥, 금칠한 거울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화려함의 정석 샹들리에까지 골고루 갖췄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환상적인 전망을 실컷 눈에 담으며 휴식다운 휴식을 취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바닥부터 천장까지 길게 뻗은 통창을 넘어 부서지는 햇빛을 쬐며, 푸짐한 컨티넨탈 조식으로 허기를 달래고, 살결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해풍을 맞으며 멋진 경치를 벗 삼아 트레드밀을 뛰고, 호텔 전체를 감싼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유수풀에서 수영하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따뜻한 스파로 피로를 씻어낸 다음에야 난 모자람 없는 해방감과 함께 잠을 청했다.
시간이 딱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싱거운 생각을 해봤다.
넘치는 활력도 좋지만 가끔은 재충전을 위한 한적하고 여유로움이 깃든 삶의 균형도 필요하다.
이 날 적었던 오래된 일기에 따르면,
시금석이 된 문 대통령의 인도 순방부터 브루나이로 이어진 내 업적에 대한 소회와 또 한 번 성장한 나 자신을 대견하게 느끼던 감동이 고즈넉한 풍경과 저물녘 석양으로 물든 근사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배가되서 마음속 깊이 남았다. 이것이 인생의 진정한 낙이구나 싶었다.
인도에 돌아오고 나서 딱 이주 정도 지나서였을까.
굵직한 행사 후 반복적인 일상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다만 이는 한 낮 남짓한 지루함에 불과했다.
인도에서의 다채로운 내 삶은 이런 반복에 쉬이 고개를 꺾지 않았다.
그런 다이내믹은 동료 언니가 잠시 담소를 나눈다고 내 사무실에 들르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사람 돌아왔던데? 우리 밥 한 끼 할까? 넌 연락받았었니?"
(동료 언니도 국경일 행사를 통해 구 남자 친구를 알고 지냈었다.)
속사포로 던져진 물음은 그에 대한 내 생각의 궤도를 바꿔놓았다. 약간의 연민과 애정이 되살아났다.
그래, 그는 마침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 옆으로. 한때의 보금자리로. 그리고 이번에는 아마 길게.
난 애써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괜한 희망을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친구라는 탈을 쓰고 얼굴 몇 번 더 보고 싶기는 했었다.
그럼에도 친구 하기에는 난 여전히 그를 좋아했기에 친구 하자는 가식은 싫었다.
퇴근해서 여느 때처럼 집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동료 언니의 끈질긴 유혹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청승맞게 아직도 매일 밤 울적한 노래를 들으며
그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소멸되기를 간구하는 나를 알아서일까? 넌지시 물었다 한 번 더.
그래서 오늘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너는 올 거냐고. 오는 게 어떻겠냐고.
들뜬 마음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는 언제나 바라고 있었다.
숙명은 정해져 있되 개인의 노력을 다하고 결과는 운명에 맡기자는 소신을 가진 지독한 운명론자로서
어디선가 그와 꼭 만날 일이 생길 것이라고.
'언니가 부르니까 가는 거야' 못 이기는 척 서둘러 준비하고 난 그 자리에 나갔다.
언니는 모르는 척 우리의 오작교를 놓아준 셈이다.
그 언니는 '너는 뭔 세기의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태양의 후예 그런 거냐'면서 치기 어린 농담으로 내 상흔을 살며시 무디게 해 주던 그런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끄럽게 계속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행여 새어 나올까 마음을 다잡고 복도에서 그를 기다렸다.
식당 앞에 다다라 테이블에 앉지 못하고 괜히 그 주변을 서성였다.
화장실도 한 번 더 가고 얼굴도 한 번 더 확인하고 끊임없이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린 끝에
말끔한 모습으로 저 멀리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를 발견했다. 난 꽤나 자주 그가 군인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깊은 한길 사람 속은 모를 일이니 외면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봤을 때 그는 대개 자유분방한 나와 다르게
잔잔한 물결에 이는 미동 하나 없이 단단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꼿꼿함이 마치 각목과 같다.
난 언제 거절당했느냐는 듯이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은 그날의 어떤 상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그와의 대화에 그리고 그 시간에 몰두했다. 시간이 재깍재깍 흐르고 빈 그릇이 하나 둘 치워졌다.
디저트를 기다리던 때, 동료 언니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우리 둘만 고스란히 남았다.
잠깐의 어색함이 우리 사이를 가득 메웠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게 돌아온 반응은 그에 응수하는 멋쩍은 웃음이 아닌 그가 입술로 속삭이던 명료한 한마디였다.
'You're so beautiful it hurts'
내 멋대로의 해석;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넌 그저 아름다운 사람인데... 몽글몽글한 낭만을 꿈꾸기에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그만의 고뇌와 한탄이 섞인 그 행간의 뜻이 힘 있게 마음에 뿌리내린 고백이었다.
몇 분 안 되는 길게만 느껴지던 그 순간 속 우리는 서로를 갈망했고 다시 연결됨을 느꼈다.
테이블 밑으로 발 끝이 닿은 채, 시선은 서로를 향한 채 우리는 그렇게 그동안의 잃어버린 시간을 메꿨다.
이날 밤은 영영 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 없을 정도로
화려한 표현들 너머의 오고 가는 눈빛으로 서로의 감정을 허용하고 인정하며 관계를 재정립했다.
내 바람대로 온 우주가 힘을 다해 우리를 서로에게 끌어다 주었다.
내가 인도에 있는 한 우리는 계속 이어질 운명이었을지도.
두 달간의 고달픔과 외로움 그리고 아픔 속에도 나만이 갖는 고유한 희망을 잃지는 않았었다.
난 같은 위도에서 저 반대에 있지만 손만 뻗는다면 닿을 거리에서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심연에는 언제나 사랑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절망의 경험을 지나 계속 그에게로 향하는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고통의 정점에는 정말 그가 있었다.
헤어짐의 현실에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삶이 마냥 그만을 기다린 것은 아니라서,
계속해서 나 자신을 살피고 내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며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얻은
행복과 어려움을 지나며 켜켜이 쌓인 무르익은 성숙함이 빈 공간을 채웠기 때문이다.
내 기억과 경험에 기반을 둔 성숙한 연애는
감정을 한계에 차오를 때까지 삼키고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치열한 감정을 상대가 이해하도록 충만히 표현하면서 기회를 주고받는 관계에서 피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했던 노력들 그리고 그와 헤어졌던 모든 시간들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끝을 아는 삶을 살지 않고 결과가 뻔한 엔딩을 맞이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살아가는 행위를 하며, 저마다의 인생 드라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니 그것으로 됐다.
난 운명론자답게 지름길을 통하지는 못해도 우리가 반드시 다시 만날 거라는 단단한 믿음을 가졌었다.
'결과를 운명에만 맡긴다면 그래서 네가 한 일은 뭔데?'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내 마음가짐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최선을 다해 그를 좋아했고 내 진심을 올바르게 표현했고
비로소 그가 진정한 안정을 찾았을 때 내 마음을 받아들였으며 우리는 이해와 연민 속 공감을 이루며,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었음을,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았음을 되새기는 그 거룩한 마음말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서로의 공간에 발을 들였고
사랑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 아닌 충분히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