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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궁인 Dec 04. 2024

Ep. 6  열애 중 퇴사, 유한한 시간 속 추억

시리지 않은 이별의 다른 모습, 서로에게 보내는 응원

인도에서의 내 인생은 그를 중심축으로 돌았다. 

업무 중에도 틈만 나면 그의 모습이 노출된 인도 국내 매체 사진을 찾아 

한참을 들여다보며 혼자 흐뭇해하기 바빴다. 

사무실 방을 같이 썼던 한국 문화에 꽤 익숙했고 우리와 생김새가 닮아있던 인도 친구가 

아주 자주 남자 친구 사진을 염탐하는 나를 공공연히 발견하며,

'너 여자친구 아니야? 남자 친구를 만나. 스토커처럼 사진만 보지 말고' 하는 핵심이 정확한 말을 하곤 했다.

순간 허를 찔린 사실만이 담긴 실리적이며 담백한 언사였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나의 그녀에 따른, 스토커 행보는 다음과 같다. 

인도 대통령궁 공식 홈페이지 최신 업로드 이미지 살피기

President of India 모든 소셜 미디어 채널 구독 및 좋아요 (여론 파악을 위해 댓글 또한 정독)

인도 국내 언론 및 보도 전문 채널 즐겨찾기

가장 나와 같은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놀랍지만 실재하는 그의 개인 팬 페이지 팔로우


난 하루 일과를 위의 여러 채널에 접속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매일 아침, 커피와 함께 그의 공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가상공간에 빠져 사색하고 그날의 에너지를 얻었다. 

사적인 모습은 데이트로 만족했다. 자주 만나지 못해 먼발치에서 그의 흔적을 찾는 습관이 생긴 걸 수도.

나만의 희열감 같은 것이 줄곧 느껴지곤 했다. 남들과 절대 공유하고 싶지 않은 우리 둘만의 연애를 하면서.

우리 둘 사이에는 항상 일정한 거리감이 유지됐다.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간격도 적당했다. 

업무의 고유한 특징을 따져봤을 때, 그이는 한 나라의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그를 보는 눈도 많고 주재국가로서 오고 가는 손님들도 많기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가 않은 반면, 

난 한 나라(인도)에 위치한 수많은 여타 나라들 속에 묻혀 나만의 명확한 책임소재, 한-인도 양국관계 그리고 나의 One and Only 주인도한국대사님만 상사로 감당하면 그것으로 전부였기에. 

이런 업무적 배경을 고려한 것이 평범한 데이트를 실현할 수 없던 우리의 거리감을 인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기다림에 익숙했고 기다림 후에 주어지는 달콤한 일상이 내겐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연애였다. 

우리는 가끔 그런 말을 한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고. 그것을 내가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어찌 보면 평범함은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과 위치에 따라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게 구현되며 더 예측 불가능하며, 그래서 때로는 그 평범함이 누군가에겐 더 대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평범함이란 시간 될 때만 만나고 전혀 계획할 수 없는 미래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여느 커플들처럼 '우리 이번 주말에 정식당 갈까? 한강 갈까? 핫플 찾았는데 거기 가보자!'

이런 다채로운 제안과 마음에 품은 호기심을 시현할 또 다른 맥락의 대화나 연락, 그리고 실현할 결심과 결정 모두 지극한 대단함이었다. 그의 일은 언제나 예측불가능으로 점철됐고 난 그저 조금이라도 틈이 벌어지면 뛰어드는 그 순간을 노리는 맹수와 같았다. 


인도 대통령의 아이슬란드 순방, 그에겐 업무
연이은 해외 순방, 볼 수 없는 그대

그 가운데 나도 내 삶을 잘 살아냈다. 우리가 인도를 무대로 연애한 동안에 그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외국 국가원수를 만나는 사람이었으니 나도 연애 외에 할 거리들을 많이 일궈놨다. 

외교모임에도 자주 나가서 한국의 민간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으며, 

한국의 국격과 위상을 높이고 국가적 인식을 제고하는 데 자진하여 공관 밖 업무를 이어나갔으며, 

인도의 곳곳을 호기롭게 여행하며 그 아름다움을 내 눈에 담아냈다. 

물론 계속 기약 없는 기다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라마단 종료의 날, 이드(Eid-al-Fitr) 모임 @이집트 대사관 및 외교가 이탈리안 쿠킹 데이

'지금은 아이슬란드 순방 중이니 인도 복귀하면 하루 이틀 내에 연락 올 거야' 지레 짐작하며 가까운 시일에 만날 것이라고 혼자 상상하며 내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만남을 기대하는 카운트다운이 가능한 적도 있었다. 

우리 모두 데드라인이 있는 단기 프로젝트 진행을 순조롭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청사진을 그려 계획, 진행, 그리고 마무리 단계까지 정해진 궤도가 있어 마음이 편하기도 하다.

혼자 잘 먹고 잘 놀던 나날들, 안다즈 델리 호텔 다이닝

그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를 환대할 때 나는 직장동료들과 한국인에게 인기 관광지이자 영화 '김종욱 찾기'로 유명세를 탄 블루시티 '조드푸르', 핑크시티 '자이푸르'와 호수의 도시 '우다이푸르'로 여행을 떠나 인도 무굴시대의 힘을 엿볼 수 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숨 쉬는 웅장한 유적지와 건축물을 둘러봤으며,

그가 호주로 해외순방을 다녀왔을 때 (그는 오고 가는 손님, 나는 오는 손님만 받는다) 나는 한 달 늦게 그 발자취를 따라 골드코스트에서 이모를 만나 패러글라이딩을 즐겼으며,

그가 인도-부탄 국가개방조약 체결을 기념하는 국빈오찬 일정을 점검할 때 나는 델리 시내의 파인다이닝 미식 경험에 흠뻑 취해있기도 했다.

그가 베트남 출장을 갔을 때 나는 싱가포르에 조용히 면접 보러 다녀오는 등 내 미래에 대한 거침없는 도전도 있었다.

낮과 밤, 변화무쌍한 우다이푸르의 모습

그와 만날 수 없던 많은 시간들을 나만의 흥미로운 영역을 확장하고 내 삶의 토양을 다양한 재미들로 윤작함으로써 허전함이 없도록 메워나간 것이다. 이로써 가치관과 철학에 충실했다.

나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워야 스스로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상호 존중 속에서 건강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2019년 모디 총리 취임식 (왼쪽) 대통령 (오른쪽) 모디 총리 그 옆은 그이

그가 모디 총리의 재임 성공에 따른 선서 취임식(Swearing-in-Ceremony) 준비로 39도에 육박하는 뜨거움 속 인체의 온갖 수분이 증발하는 듯한 현실판 가뭄에 주야 장천 분주할 때만큼은 난 모든 일을 멈춘 채 그를 기다렸다. 그 사람은 너무 힘겹게 이 시간을 버텨내고 있는데 안락한 환경에서 혼자 재미만을 추구하기엔 나는 그를 너무 사랑한 것이다. 고통을 나누고 싶었다. 멀리서나마 지켜봤다. 시시각각 변주하는 현장 상황을 보도하는 뉴스 채널들을 여럿 돌려가면서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 하듯 눈을 부릅뜨고 행여나 그의 모습이 화면에 비칠까 기다렸다.

5시간 스트리밍 예정을 알리는 영상 아래 채워진 긴 타임프레임 막대기만큼이나 기다림의 마음 또한 타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주시했을 때였나. 그 어떠한 각도, 채도 및 명암에도 방해받지 않는 그를 향한 나의 레이더에 그의 모습이 포착됐다. 연신 제 입술을 아밀라아제의 힘을 빌려 적시던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가엾은 마음에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타인의 시선을 빌려 그를 바라보며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하는 어쩌면 그의 마음이었을 수도 있는 심정으로 나 또한 그 시간을 측은지심과 응원으로 감내했다. 

5월, 인도가 이제 막 지옥의 열기로 들끓기 시작한 한 여름날의 고단함이었다.


그렇게 6월이 찾아왔다. 

이 시기부터 내 마음은 서서히 변화에 대한 욕구로 물들어갔다.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다음은 뭘까? 

큰 도화지가 있다면 내 미래를 주제로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소를 다채롭게 꾸미고 싶은 도약과 성장에 대한 욕심이 싹튼 것이다.

대사관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크고 작은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그 과정에서 귀감이 되는 많은 영향력 있는 사람을 만났고 훗날의 커리어에 자양분이 될 풍부한 경험을 축적했으며, 직장 내에서 인정도 받았지만 내가 가고 있는 방향과 이루고 싶은 인생의 목표나 목적이 분명하지 않아 회의감이 들었다. 

사실 이대로도 나쁠 건 없었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나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을 느꼈다. 해외 주재원 생활도 2-3년이면 살만해지고 살만해지면 떠나야 한다던데. 어쩌면 나 또한 이 시기에 다다른 그동안의 안주했던 삶에 훈령을 내리는 나 스스로의 혁명적인 각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채색으로만 보이는 내 시선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난 퇴사를 몇 달간 조심스레 마음속에 품고 다녔다.


그에게 내 결심을 쉽게 말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에 난 항상 마음을 함께 했으며 조용한 응원을 보탰고 일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대주제 사이에 너무나도 어려운 선택을 하게 만들지 않는 것으로 그의 일과 생활의 균형을 흔들지 않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그 또한 새로운 방향에 실린 내 바람들을 이해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확신이 있었다. 이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하는 정교한 대화의 순간은 국빈급 순방과 그 의무감이 맞먹는 한국 가족의 인도 방문이 확정되며 잠시 미뤄졌다.

이맘때쯤 모디 총리 연임 관련 대부분의 일정을 동행하던 대통령 탓에 사랑을 희생하던 남자친구에게 난 심히 토라졌고 넌지시 가족 방문 소식을 문자로 툭 던질 수밖에 없었다. 감감무소식의 며칠이 지나고 나의 감정선을 대체 어떻게 다루는 건지 미워하려고 하면 그 찰나에 어디선가 튀어나와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랑의 온기로 채워 넣는 그를 도무지 어떻게 미워하랴 싶었다. I hate you, but I love you 

볼 한번 꼬집고 말 수밖에.   

우리 사이에 가끔 찾아오던 위기 그리고 내 낙담도 이제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그를 볼 수 있는 한정적인 시간과 겹치며 '밀당'이라는 사치 앞에 무참히 패배했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마음도 그의 기가 막힌 타이밍과 농후한 친밀함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가족이 머물던 델리 시내 중심의 하얏트 리젠시 호텔

가족이 도착하기 하루 전, 그는 소리소문 없이 그때까지 조용히 우리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델리 여러 명소와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 방문까지 일정에 필요한 부분들을 혼자 고민하고 계획해서 미리 연락해 두고 마지막엔 알려줄 뿐이었다. 

이 사람들한테 전화만 하면 다 알 거라고. 본인들이 무슨 일들을 할지. 그렇게 바쁜 와중에 적재적소에 우리 가족을 위한 조력자들을 배치해 두었다. 이런 사람인데. 난 도무지 혼자 분노를 키우고 토라져있을 수 없었다.

혼자 멋있는 거 다하니까 오히려 치사하게 느껴지고 그새 그를 미워하고 있던 나 자신이 창피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놀라게 하고 충족시키며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키는 사람이었다. 아주 묵묵하게. 거창하지 않게. 

나에게는 없는 그의 침착함과 잔잔함이 결국 우리의 사랑을 완벽하게 키워나가는 그 사람만의 매력이었다.

(왼쪽) 주인도한국대사관 (가운데) '꾸뜹 미나르', 이슬람 왕조의 승리의 탑 (오른쪽) 전경

근 2년 동안 의전하며 쌓았던 노하우와 경험, 제일 요긴했던 인맥을 십분 활용하여 가족들의 인도 방인을 VIP 행사처럼 기획했다. 델리 하얏트 호텔을 예약하자 예약팀에서 내 이름으로 발견하고 스위트룸으로 무료 업그레이드를 해주고, 타지마할 방문 일정을 잡고 문 대통령이 UP 주지사와 티 타임을 가진 인도의 찬란한 역사와 무굴 제국의 화려한 건축양식이 특색인 세계인의 발길을 이끄는, 오베로이의 또 다른 럭셔리 호텔 Amarvillas에서 행사 때 인연을 맺은 식음료 총괄 매니저와 일정을 조율해 현지식 오찬을 준비하고 주정부에서 지정한 선임 전문 가이드가 인도하는 타지마할 견학, 여러 신이 머무는 최대 규모의 힌두교 사원 악샤르담에서 행사 당시 여사님 담당이었던 도슨트의 해설까지 행사 때의 소중한 인연으로 지금은 친구가 된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럿의 도움을 받아 공들여 준비를 마쳤다. 

내 가족은 나에게 있어 문 대통령 보다 더 위에 있는 VVIP였기에 치성을 드렸다. 

포토 스팟인 대통령궁 앞마당에서 그리고 뒤편의 무굴 정원, 붉은 석양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미를 장식한 건 내 남자친구의 정성 한 방울이었다. 

Rashtrapati Bhavan('라슈트라파티 바반'이라 읽고 뜻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머무는 장소) 바로 대통령궁 투어다. 본인의 거처이자 근무지이기도 한 무려 대통령궁을 그는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있고 조금은 남들보다 수월하게 궁투어를 예약하고 본인이 개인 안내자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대통령궁은 모든 국민 그리고 관광객에게 열려있는 공간이지만 특정한 시기에만 입장이 허용되며, 가끔은 인기 가수의 공연 티켓을 예매하는 것 정도로  한 자리 얻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게 내 가족이기에 우리는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다. 대통령궁을 여태껏 천천히 구석구석 둘러볼 기회가 내게도 좀처럼 없었다. 가끔 급작스레 만나거나 궁 건물 웨스트 윙에 있던 그의 숙소에서 보낸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엄두가 안 났었는데 가족 방문을 계기로 나도 제대로 된 투어를 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우리 가족과 그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성스럽게 기다렸다. 


그의 신분과 직무를 나타내는 'ADC to the President'가 새겨진 휘장과 인도 공군을 대표하는 푸른 약정복 (정복 대신 입는 근무복의 개념)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긴 팔다리를 뽐내며 가족을 향해 성큼성큼 환화게 웃으며 걸어오던 그의 모습을 난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만큼 아름답게 추억한다. 응접실 복도에 깔려있던 레드카펫을 지나 그가 우리에게 가까워질수록 주변에 있던 의식, 예식 그리고 공식 행사에 등장하는 근위대 일원들이 질서 정연하게 좁혀지는 우리 사이의 간격을 따라 양 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내주었다. 그 순간 그이가 짊어진 책임감, 수행하는 직무, 대표하는 신분 그리고 지켜야 하는 명예까지 모든 것이 내 시야로 좁혀 들어왔다. 모세의 기적은 이런 것이었을까.

Durbar Hall 연회장 및 응접실에서 단체사진

사실 내가 아는 우리 가족, 특히 엄마는 그에 대한 '듬직하고 잘생긴 청년일세'하는 반응을 넘어서 그를 사위로 허락한 눈빛이었다. 그는 감출 수 없는 표정 변화 그리고 어색한 영어로도 숨길 수 없었던 엄마와 막내이모의 감탄을 자아냈고 그리고 외국인과의 벽이 높았던 우리 언니조차도 먼저 악수를 청하게 했다. 이때만큼은 개인의 삶보다 우선시하는 업무와 본인 직무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 뚜렷한 직업의식을, 나와의 관계에서는 종종 과도한 우직함으로 치부했던 나의 판단을 부끄럽게 여김과 동시에 그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임 대사 임명 및 신임장 수여, 국빈 만찬과 환담이 이루어지는 공식 행사 장소인 Durbar Hall(둘바르* 홀)을 둘러보며 인도의 아득한 5천 년 역사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을 때쯤 야속한 전화기가 울렸다. 상사의 긴급 호출이었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내 단잠을 깨우는 불쾌한 소음과도 같았다. 그렇게 이번은 제대로 보나 싶었던 대통령궁을 결국 놓아주며 내 투어는 막을 내렸다. 그 이후 가족들의 투어는 나의 퇴장에 개의치 않고 그의 극진 대접을 받으며 순탄하게 이어졌다고 한다. 난 발 들여본 적 없었던 그이의 사무실에서 난 마셔보지도 못한 그가 직접 탄 인도식 짜이(차)를 마시며 호사를 누렸다는 후기에 내가 가지지 못한 그와의 시간에 대한 부러움과 더불어 우리 가족에 대한 그의 진심에 잊을 수 없는 감동을 했다.  

*Durbar: '더르바르' 혹은 '둘바르'라 부르며 왕이나 통치자의 고귀한 궁정을 뜻하는 페르이사어 파생어이며, 국정 운영을 논의하거나 공식 회의를 진행하는 장소.


길이 남을 색다른 대통령궁 투어를 마치고 내 가족은 인도에서 잘 살고 있는 딸, 조카, 동생을 두 눈으로 확인한 뿌듯함과 안도감 그리고 내 곁을 지켜주는 훌륭하고 견실한 그와 키워가는 우리의 풋풋한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선사한 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며, 난 가족과 가득한 추억을 안고 당분간의 헤어짐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우리 가족의 그에 대한 사랑은 기본값이 되었다. 


7월이 다가왔다. 지금껏 두리뭉실했던 꼬리를 물고 이어졌던 여러 가지 미래에 대한 막연했던 생각들이 차츰 명료한 결심으로 귀결되었다. 난 마침내 퇴사하기로 했다. 나의 찬란했던 2년간의 인도 생활을 마무리하고.

오래된 편안함과 새로운 자극 사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지만 난 진척 없는 삶을 지양하는 인간이었고 그러기엔 꿈도 많았고 열정도 넘쳤다. 싱그러운 기운과 활력은 내 선택을 그리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불투명한 커리어 개발의 기회와 모호한 외교의 길. 


내가 선망했던 국가 간의 외교가 오랫동안 의전으로만 느껴지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내 능력의 한계였을 수도 있지만 비외교관 출신으로 외교부에서 더 이상 내가 염원하고 키워나갈 궁극적인 목표도 더 큰 그림도 없었기에 난 굳은 결심을 했다. 무모하리만치 어딘가에 자리를 찾아놓고 보인 행보는 아니었다. 다른 갖고 있는 패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떠나야 하는 때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는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그에게 헤어짐을 말해야 하는, 이번에는 내가 지난날 그 사람의 입장에서 고해야 하는 이별. 그가 괜찮다면 난 장거리 연애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래도 난 단서 하나 없이 일방적으로 내게 슬픔을 안겨줬던 그 사람보다는 훨씬 덜 잔인한 방법을 택하는 거라며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 여기며 위안 삼았다. 심지어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명확하고 그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로 헤어지는 것이며 여기서의 헤어짐은 영원함이 아니라 언제든 마음먹으면 서로를 볼 수 있는 기약 있는 기다림이기에.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닌 이어가는 쪽을 선택한 나의 확고한 의지와 결단력도 있었다.


그가 7월 중순쯤 가족들과 함께 두바이로 휴가를 갔다. 

(인도에서 두바이는 세 시간 반 비행으로 가까운 휴양지다.)

오붓한 가족여행에 나의 퇴사 소식이 행여나 우울한 일이 될까 델리에 돌아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당시 워싱턴 D.C. 에 살고 있던 남자 친구의 작은 누나까지 오랜만에 인도로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더더욱 소중한 그의 가족여행이었다. 

나는 사실 그의 의연함에 기댄 채 서프라이즈 뉴스를 터트리는 데 큰 긴장을 하지는 않았다. 

델리에 도착하고 나서 그다음 날 밤 저녁 데이트를 했다. 

내가 평소에 즐겨 찾는 번화가에 위치한 로컬 플랜테리어가 기가 막힌 유럽피안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석을 예약했다.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데 있어 분위기도 한몫을 하기에. 

크게 빙빙 돌아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더 시간 끌 것이 없었다. 


"나 8월 중순까지만 인도에 있게 됐어. 내 커리어에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게 지금이어야 할 것 같아. 우리 계속 만났으면 좋겠어.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는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재외공관의 특성상 언젠가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는 사람들인걸 그도 잘 알기 때문에 커리어의 개발이나 진전에 대한 계획이 아닌 생각보다 그 시기가 그의 예상을 벗어나 빨리 찾아온 것에 대한 아쉬움과 놀라움의 마음이었다. 그와 나는 사람을 계속 만나기도 하고 끊임없이 헤어짐을 대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익숙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과 그 여파로 형성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도. 하지만 헤어짐이란 항상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임기가 정해져 있는 외교관이란 직업도 친밀함을 쌓게 되면 야속하게도 서로의 자리로 돌아가는 때가 찾아오며 또다시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그와의 헤어짐은 더더욱 어려웠다. 사랑이 시작된 이후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고비를 잘 넘기면서 굴곡진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든 맺어나가는 노력이 빛을 보았는데 피치 못할 어떤 이유도 아니고 내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하나의 방해요소가 생긴 것이니. 


우리는 이내 기운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했다. 

그도 나의 결심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응원하고 더 반짝이고 싶은 내 마음을 이해했다. 

내 앞날을 지켜보고 그리고 함께하고 싶다고 나의 물음에 대해 그는 진심으로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일이 끝나면 간간히 데이트를 이어 나갔다. 달라진 건 없었다. 

예전처럼 너무 가슴 아픈 헤어짐은 아닐 것이니.  

내 편에 보낼 가족 선물을 고르는 그, 사리 매장

한 날은 그가 준비한 서프라이즈 데이트에 응했다. 한국 N서울 타워처럼 꼭대기 층에 회전하는 식당이 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델리에서의 마지막 일주일, 그 끝 무렵쯤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우리의 미래에 드리우는 자칫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무거운 주제에 그가 먼저 불을 지폈다. 

사랑의 시작보다 더 중요한 그 사랑의 지속에 대한 그의 견해와 현실적인 면면을 우려한 그의 신중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장거리 연애는 대단한 결정이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문화와 배경이 다른 커플들에겐 넘어야 할 산도 분명 존재한다. 난 한 가지, 내가 줄곧 놓치고 있었던 우리 사이의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을 논의할 때 씁쓸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 인도 모두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더 먼 미래를 그린다면 그건 결혼일 수도 있다. 

그에 앞서 군인 신분인 그는 인도 군대에 대한 특별 혼인법(the Special Marriage Act, 1954)의 적용을 받아 외국인 국적자와 혼인할 경우 여러 제한을 받게 된다. 20년의 의무 복무기간이 끝나면 퇴직연금 및 평생연금, 의료보험 및 세제혜택이 주어진다. 중간에 그만둘 경우 모든 복리후생 및 연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내가 인도 시민권을 확보하게 되는 그 기간(평균 7-8년 소요)까지는 한국 국적을 유지할 수 있으나 그가 20년 의무기간을 넘어서 복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인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정부에서 인정하는 법적 인증서인 No-Objection-Certificate(NOC)를 취득함과 동시에 인도공군 High Command 최고 사령부로부터 특별 혼인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 무게를 알지 못했다. 이해하기도 어려운 인도 헌법 조항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내 뇌리에 박힌 것은 '인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밖에 없었다. 내 뿌리는 한국이고 나의 정체성은 한국인이다. 난 그 무엇과도 한국 국적을 바꿀 수 없었다. 대체 불가한 나의 자아와 같은 내 모국. 난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오히려 무지해서 용감할 수 있고 망각하기 쉬운 내 순간의 우둔함을 택했다. 갑자기 쏟아진 진실에 압도될 것 없이 우리 둘은 차근차근 필요한 것들을 헤쳐나가기로 했다. 높은 벽들을 허물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함께라면 두렵지 않았다. 

그와 보낸 마지막 일주일 중의 데이트 그리고 내가 남긴 우리 둘을 위한 작별 선물

그렇게 우리 둘은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는 특유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어서 선물을 사러 가자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두 손 가득히 인도의 풍부한 노동력과 예술적인 장인정신으로 탄생한 섬세한 수공예품과 전통 의상 사리(Sari)를 내게 안겨줬다. 그의 따뜻한 정은 흐르고 넘쳤다. 난 이주에 걸쳐 완성된 전통 한옥에서 영감을 받은, 아직 한국을 가보지 못한 그에게 한국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서로의 우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사진을 함께 넣어 그에게 당분간은 마지막일 수 있는 내 손길이 담긴 선물을 건넸다. 'Remember, I'm here with you.'라는 문구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항상 그를 멀리서 보고 있었고 마음만은 가까웠던 우리를 떠올리며. 이젠 정말 물리적 거리감까지 커져 버렸지만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마음만은 가까이 있을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는 묵직하게 한마디로 응했다. 'You're my strength.' 평소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그임을 알아서 그동안의 인내, 끈기 그리고 한결같은 사랑을 보인 내게 바치는 그의 최고의 찬사이자 감사였다.  


그 후 얼마 뒤, 대한항공 인도 지상직 팀원들(공항의전으로 협업한 적이 많았다)의 재량으로 그동안의 노고와 열정에 대한 그들의 헌사와 같은 비즈니스석 업그레이드를 선물 받고 쭉 뻗은 다리와 함께 흔연하게 2년간의 인도 라이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와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공항 가는 길. 깊고 진한 여운이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우리의 이별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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