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2025년 7월 7일 월요일 -

by 최용수

♡ 안토닌 드보르자크 (Antonín Dvořák, 1841~1904)

< 현악 4중주 12번 바장조, Op.96 "아메리칸"/ String Quartet No.12 in F Major, Op.96 "American" >


https://www.youtube.com/watch?v=HrqgMrwG4i0&list=RDHrqgMrwG4i0&start_radio=1

The New York Philharmonic String Quartet


사실 지난 토요일 아침부터 걱정이 많았다. 일본의 7월 5일 대지진과 쓰나미 예언이 혹시나 현실이 되면 어쩔까 싶어 토요일 아침 눈뜨자 마자 인터넷과 SNS를 검색했었다. 다행히(!?) 도카라 열도 부근에서 규모 5.4의 지진 발생, 큐슈지역의 사쿠라지마 화산 분화가 재개되긴 했지만 예언 속의 대지진, 쓰나미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인들에게 그 날 아침은, 바다 건너 대륙의 끝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의 공포와 두려움이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특정된 날짜는 큰 일 없이 지나갔지만, 과학적인 근거까지 더해진 대지진(도카라 열도가 아닌 난카이 해곡에서 시작될 것으로 예측된)과 쓰나미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일본 국민들 마음 깊은 곳의 불안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미운 이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불행과 고통은 우리에게도 깊은 상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재 능력으로 어떤 재난상황이 닥치더라도 피해가 최소화되길 진심으로 기원하고 또 기원한다.

다행히 월요일, 오늘 아침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계는 아침 5시에 맞춰 울렸고, 세상도 나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새벽 산책을 나선다. 이런 아침에 딱 듣기 좋은 곡이 드보르자크의 현악 4중주 12번 바장조, Op.96 "아메리칸"이다. 이 곡은 실제 드보르자크가 미국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시골마을을 산책하며 악상을 떠올려 쓴 곡이기 때문이다. 백견(百見)이 불여(不如) 일문(一聞)!




1893년 드보르자크는 체코 프라하 음악원 교수직을 그만두고, 미국 뉴욕 음악원의 교수로 초빙되어 미국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해 여름 그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보헤미아 출신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아이오와주 스필빌에서 함께 휴가를 보내게 되었는데, 이 작은 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친절한 이웃들이 너무 좋았던지 그 느낌을 음악으로 만들고 싶은 강한 욕구가 생겼던 듯 하다.

드보르자크는 스필빌 인근의 숲과 강의 아름다움, 마을을 산책하며 들었던 교회의 오르간 소리들을 그의 작곡의 소재로 삼아 곡을 써내려 갔다. 작곡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초고는 단 3일 만에 완성했고, 6월 23일에는 손댈 곳없는 만족스러운 악보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곡이 완성되자 드보르자크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빨리 끝낼 수 있어 정말 만족스럽습니다”라는 자필 원고까지 남겼다.

드보르자크는 스필빌 마을의 정경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1년 넘게 지내며 쌓여왔던 고향 보헤미아에 대한 향수, 그리고 미국에 와서 수집하고 있었던 흑인들이 부르던 영가(靈歌)의 선율과 리듬도 함께 이 곡에 담았다. 이 작품에 담긴 흑인 영가의 선율과 리듬때문에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니거 4중주(Nigger Quartet)’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오늘날에는 명백히 부적절하고 인종차별적 표현이지만, 드보르자크는 흑인 영가와 민요를 연구하며, “미국 음악의 미래는 흑인 멜로디에 기반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흑인 음악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터라 ‘니거 4중주(Nigger Quartet)’라는 별명이 오히려 이 곡의 주요 선율이 흑인 영가풍임을 밝히는 의미여서 별로 개의치 않았던 듯 하다. 그래서 이 별명은 당시 출판물, 음반, 공연 리뷰 등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고, 1950년대까지도 일부 음반이나 평론에서 ‘Nigger Quartet’라는 명칭이 쓰였다고 한다.(요즘 이렇게 썼다간 인종차별적 표현으로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이 글에선 역사적 맥락 설명으로 인용한 것이니 두루 혜량해해주시길...)

재밌는 사실은 이 곡의 부제처럼 붙어 있는 ‘아메리칸’도 드보르자크가 직접 붙인 이름이 아니라는 점이다. 드보르자크가 자필 악보 표지에 쓴 제목은 ‘아메리카에서 작곡한 두 번째 작품, 현악 4중주 F장조’인데 이 긴 제목을 당시 사람들이 그냥 편하게 ‘아메리칸 현악 4중주’라고 부르다 어느 순간 '아메리칸'만으로 줄여서 쓰다보니 '아메리칸'이 그냥 '부제'가 되었다고 한다.


드보르자크의 작품 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흔히 '신세계 교향곡'이라고 부르지만, '신세계로부터'가 정확한 번역이다. 원제가 Symphony No.9 “From the New World”)가 우리에겐 가장 익숙한 곡일텐데, 특히 이 곡의 2악장 Largo는 'Going Home'이란 노래로 편곡돼 우리 세대가 중학교 때 음악시간에 배우기도 한 곡이다.

이 노래에는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와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노래로 차별과 고통을 이겨낸, 말그대로 흑인들의 지친 영혼을 달래는 노래, 영가(靈歌)의 멜로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노래는 1922년, 드보르자크의 제자이자 음악학자인 윌리엄 암스 피셔(William Arms Fisher)가 2악장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만들었다.


■ 리베라 합창단의 천사같은 목소리로 예전 수업시간에 배우던 기억을 떠올려 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2fX-hhzL8cY&list=RD2fX-hhzL8cY&start_radio=1


19세기 후반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과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인종 차별과 분리가 심각했다. 그런데, 일부 진보적 교육기관과 음악원에서는 흑인 교육을 시도했는데, 특히 1885년 설립된 뉴욕 국립음악원은 창립자 제넷 서버(Jeannette Thurber, 발음상으로는 썰버가 더 정확하지만)의 의지로 백인뿐 아니라 여성과 흑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교육기관들이 인종차별과 성차별로 흑인과 여성의 입학을 제한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예외적으로 인종통합교육을 실천한 뉴욕음악원이야말로 진정한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교육기관이 아닌가 싶다.(어느 시대든 제넷 서버같은 선각자들 때문에 이 모순덩어리 세계에 그나마 인간다움이란게 남아 있지 않나 싶다.)

드보르자크 또한 이런 뉴욕 국립음악원의 진보적인 정책에 적극 동의했고, 그가 1892~95년까지 뉴욕 국립음악원 원장(실제는 명목상 원장이었고, 그의 주업무는 작곡과 지휘과 교수였다)으로 재직시 흑인 학생들에게 장학금까지 지급(1894년부터)했다고 한다. 뉴욕 국립음악원에서 공부한 흑인 학생들은 당시 미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단에는 거의 참여할 수 없었지만, 음악원에서 전문 교육을 받은 덕분에 교회 합창단이나 소규모 앙상블에서 활동하며 조금씩 음악계에 흑인들의 자리를 만들어 갔다.

드보르자크는 제자였던 흑인 학생 해리 T. 버리(Harry T. Burleigh)에게 흑인 영가를 자주 불러달라고 요청했고, 그 선율과 리듬을 연구해 그의 여러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특히 그의 9번 교향곡 2악장 ‘Largo’는 흑인 영가의 5음 음계(펜타토닉)를 사용해 단순하지만, 서정적 멜로디, 그리고 흑인들의 고향에 대한 깊은 향수와 그리움의 감정까지 아름답게 담아냈다. 드보르자크 본인은 “특정 영가를 인용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동시대 음악가들과 청중들은 이 악장에서 흑인 영가의 깊은 영혼의 울림(소울, soul)을 느꼈을 것이다.




현악 4중주 12번 ‘아메리칸’은 4악장 구성으로, 각 악장은 미국의 자연과 민속음악, 체코 민요, 그리고 교회 음악의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1악장(Allegro ma non troppo)은 비올라가 오프닝 주제를 맡아, 숲속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느낌의 트레몰로로 스필빌의 상쾌한 아침 산책로를 연상시킨다. 주제는 펜타토닉(5음 음계)으로 표현되어 단순하지만 깊은 서정성을 가지고 있이다. 2악장(Lento)은 흑인 영가와 미국 인디언 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선율이 첼로의 매혹적인 음색으로 깊은 감정 표현이 돋보인다.(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짙게 배어 있는 악장이다.)

3악장(Molto vivace)은 밝고 유머러스한 스케르초 형식으로, 드보르자크가 산책 중 발견한 새의 울음소리를 바이올린으로 표현해 상쾌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마지막 4악장(Finale)은 활기차고 명랑한 론도 형식으로, 중간에 스필빌 교회 오르간의 코랄 선율을 모방한 조용한 악구가 등장해 독특한 감성을 더한다.


■ 이 곡은 짧고 간결하지만 완벽한 구조와 자연스러운 흐름, 매력적인 선율과 리듬을 갖추고 있어 실내악 입문자에게도 추천되는 필수 레퍼토리일뿐만 아니라 영화나 CF에서도 흑인 영가풍의 서정적 선율이 종종 사용되는데,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 초반부에 테오도르 로리(티모시 살라메 분)와 조 마치(시어셔 로넌)가 파티장을 빠져나와 베란다에서 춤추는 장면에 삽입되었다. 아래 유튜브 링크에서는 2'25"부터 나온다.(영상 앞부분에 파티장에서 흐르던 음악은 귓썰미가 좋은 분들은 몇일 전 소개한 브람스의 16개 왈츠 모음곡 중 15번(Op.39)이 기억날 것이다.)

- https://www.youtube.com/watch?v=Y455IloaJZ8


■ 드보르자크의 현악 4중주 12번 바장조는 전문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은 곡이라 스메타나 현악 4중주단, 야나체크 현악 4중주단, 알반 베르크 4중주단, 하겐 4중주단, 줄리아드 4중주단 등의 명연주 음반도 많이 남아있다. 마침 스메타나 현악 4중주단의 음반이 유튜브 링크에 있어 소개한다.

- https://www.youtube.com/watch?v=uZhfUMaAeIg&list=RDuZhfUMaAeIg&start_radio=1



♡ 어떤 결심


- 이해인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아플 때

한 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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