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가면.
사람마다 마음이 편안해 지는 장소는 다 다르다. 최근에 강릉으로 혼자 휴가를 다녀왔다는 지인의 이야기에 가서 뭐했어라고 물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휴가의 목적이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삼박사일을 아무 연고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푹 쉬다 왔다고. 원 없이 바다만 바라보다 돌아왔다는 그의 대답에 괜히 조금은 부러운 느낌이다. 일상의 문제들을 다 걷어내고 낯선 장소에서 그저 혼자이고 싶은 시간. 그럴 때마다 훌쩍 혼자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직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여백이 충분한 시집의 한 페이지 같은 인생은 아직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빡빡한 매일의 시간을 쪼개어 줄글 한자 읽기 힘든 하루, 마구 비벼 해지다 못해 찢어질 것같이 너덜너덜한 신경줄을 간신히 부여잡고 일상의 문제들을 머릿 속에서 끊어내고 싶을 때, 가까운 시장으로 간다.
시장의 종류는 가리지 않는다. 오늘 하루만 열리는 임시장터도 우리나라 최고급 백화점의 식료품관도 모두 각기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다양하고 새로운 물건을 구경하고, 그 곳의 분위기를 구경하고, 다른 사람들의 장바구니도 슬쩍 구경하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한 발 떨어져서 시장에서 벌어지는 여러 풍경을 관찰하다보면, 머릿속을 온통 사로잡고 짓누르던 생각들이 쉬이 사라진다. 당장 눈 앞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그림과 사람과 소리들을 소화하기에도 벅찬 상황. 처음보는 물건들에 정신이 팔리기도 하고, 잊고 살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기도 하고. 시장은 딱히 별다른 생각의 여지가 없어서 좋다. 여백없는 나의 삶이 버거울 때, 이렇게나 빡빡한 남의 삶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위로가 된다. 적당히 시끄러운 소음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맛있는 냄새와 향기가 간간히 흩날리는 골목. 사람의 부대낌조차 당연스러운 혼란의 공간. 일본 여행 중에 돈키호테에서 쇼핑하던 시간이 제일 편한 기분이 들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나라에 가도 제일 먼저 가는 곳은 시장이다. 도착한 그 날 그 마을에 벼룩시장이 열린다면, 제일 럭키한 기분. 현지 시장에서 파는 에코백을 사고나면, 그 마을사람처럼 장보는 기분이 들어 신이 난다. 어느 나라나 벼룩시장 구경만큼은 공들이는 재미가 쏠쏠한 편. 거의 실패가 없다. 살아온 이야기가 담긴 빈티지부터, 오늘 아침에 따 온 신선한 딸기 바구니까지. 아직도 따끈할 정도로 막 구워온 바게트를 쓱쓱 썰어 토마토와 브리치즈를 투박하게 끼워 주면, 이만한 점심이 없지. 하루 종일 물고 다니며 그 거리의 살림살이들을 구경한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자면 그 어디나 사람 사는 모습 다 같아보이기도 하고, 또 한 입 베어물어 보면 그 속사정은 우리랑은 완전히 다르구나 싶기도 하고. 물론 비주얼에 홀려 덜컥 샀다가 한 입만에 다 버리는 음식들도 있다. 다양한 맛의 경험만큼은 시장여행자들의 특권이자 개별 문화권에 대한 호기심의 집합체 같은 것이 아닐까. 역시 시장구경은 먹는 것만큼 남는 것이라고. 그렇게 시장에 가면, 내 삶에 가장 부유한 순간들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