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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 young in season Apr 16. 2018

Over the sea

일상의 바다를 건너 제주에 가면,


봄날 길게 드리운 햇살도 조금씩 지루해지는 오후, 무작정 창 밖을 내다보노라면 그냥 떠나고 싶은 생각에 울컥이는 것은 나 뿐인 걸까. 평소라면 그대로 주저 앉았을텐데, 이번만큼은 생각이 점점 커진다. 정말 당장 떠날 수 있으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발목에 칭칭 감겨 있는 매일의 짐과 무거운 생각들을 통채로 떨쳐낼 수 있으려면 적어도 바다는 건너줘야 한다. 애써 뒤적이는 출장거리에, 다행히 제주가 걸려 있다. 지금은 하귤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계절이고, 농원의 사진과 취재는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이 계절의 제주는 처음이라서 여전히 낯설다. 길가에 가로수처럼 보이는 야자수 잎사귀부터, 남쪽나라 특유의 나무와 풀들까지 생소한 그림이 한창이다. 언어만 제외하면, 외국이라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편. 늘 보던 그림에서 벗어나니 눈가부터 시원해지고 마음이 편안해 진다. 혹은 머릿카락 끝을 감도는 바람결처럼 마냥 자유로워 진다. 분명히 출장이라는 핑계를 대고 왔건만, 바다를 건너는 순간부터 팽팽하던 신경줄은 다 풀린 지 오래. 발길이 닿는 대로, 불어오는 바람 대로 넘실대며 걸음을 이어갈 일만 남았다. 두 눈에 가득 담기는 바다풍경을 뒤로하고 출장을 빙자한 자유라는 이름의 하루가 제주에서 막 시작되었다. 



하귤농원에서 나오는 길, 중문단지로 들어가는 진입로엔 키 큰 나무들이 가로수처럼 줄지어 있다. 푸르고 반짝이는 잎사귀 곁에 붉은 다홍치마 같은 꽃송이들이 치렁치렁하다. 처음 보는 나무에 머리 위로 높게 달린 붉은 꽃, 동백이었다. 알아본 게 신기할만큼, 지금껏 머릿 속으로만 알아왔던 동백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긴 가지 끝에 달린 꽃송이가 이렇게 작고 소담할 줄이야. 바닥에 떨어진 꽃무리의 붉은 빛깔이 사치스럽기 짝이 없다. 비단 카펫 마냥 꽃잎을 밟으며 걸어 내려오는 길에서, 문득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짙은 빛깔보다 한층 잔잔한 향기를 가득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언제부터 제주 녹차였을까. 보성이나 하동처럼 옛부터 유명한 녹차 산지를 두고서, 제주녹차를 꾸준하게 이야기 해 온 곳은 바로 여기였다. 눈 앞에 펼쳐지는 푸른 녹차밭은 유리창의 풍경 그 자체로 그림이 되고, 우리는 그 풍경을 마주한 채로 제주의 봄, 유채꽃과 금귤이 떠 있는 노란 영귤에이드를 마셨다. 같이 출장 온 현정이가 언니는 뭘 그렇게 바라보고 있냐고 묻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궁했다. 눈 앞의 푸른 빛에 초점을 두고 멍하게 앉아있었을 뿐이라서. 아무리 휴일이라는 이름으로 내 방에 앉아 있어도 쉴새없이 돌아가던 분주한 머릿 속의 퓨즈가 여기서 나가버린 느낌이랄까. 뒷통수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느지막히 돌아온 저녁 즈음, 제주 갈치를 원없이 먹으리라 다짐했던 가게의 정기휴일이었다. 어딘가를 찾아서 출발하기는 늦은 시간, 이쯤되면 시장에 가 보는 수 밖에 답이 없다. 숙소 근처의 제주 동문시장으로 길을 나섰다. 서울에서 딱새우회를 먹자면, 제주에서 아침에 비행기 특송으로 올려보내야 한다. 최근에 그 귀한 회를 지인 파티에 시켜 먹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양이 부족할텐데 그렇게 눈치도 없이 혼자서 딱새우를 다 먹었다고 잔소리를 들었던가. 원없이 먹어보자며 문을 닫는 횟집에서 떨이 한접시를 들었다. 컴컴해져가던 시장 골목의 한쪽 끝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마침 야시장이 열린 덕에, 제주에서 그 귀한 광어로 만든 피쉬앤 칩스를 먹어보았다. 한 쪽에는 우도땅콩으로 만든 엿을 대패로 밀어 아이스크림에 섞어주는 언니가 있었다. 썩썩 대패가 몇번 지나가면 얇게 밀린 땅콩엿이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듬뿍 얹어지고, 이를 종이로 돌돌 말아준다. 역시 시장은 먹는 구경이 최고, 맛있는 것은 어디나 다 똑같다.   



그렇게. 제주에서 낯선 하루가 지나갔다. 

마음과 머리 그 틈 사이로 작은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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