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여름, 아침 저녁의 가을 사이에서
홍차를 처음 배운 것은 스물여섯 살,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생활을 하면서였다. 아침이면, 대표변호사인 Mr. Bradley가 전 직원 일곱 명이 앉아있는 사무실을 쭉 돈다. 모닝 티를 직접 타 주기 위해서. 이름이 불리면 취향을 말하면 된다. With milk and 2 sugar 같이.
물론 기본은 커피가 아니라 홍차다. 역시 사무실엔 밀크티가 대세. 한국의 커피믹스 같은 느낌인 셈이다. Just black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대체로 나 혼자였다. 샌드위치로 간단히 때우는 점심 이후에 오후의 티타임은 자유롭게. 운이 좋으면 marks and spencer의 버터 쿠키부터 간단한 초콜릿까지 선반에 놓여있었다. 심부름을 하고 돌아와서 마시는 한잔의 블랙티와 버터쿠키 2개의 즐거움. 특히 바람이 사납고 비바람이 섞여 휘몰아치는 봄가을의 아일랜드에서 하루에 7번씩 바뀌는 날씨에 지쳐 돌아오면 수고했다고 옆자리 직원이 타 주던 한 잔의 진한 밀크티. 지금도 기억하는 그 사무실의 티백은 Lions라는 브랜드의 저가 보급형 제품이었다. 그 후 수많은 고급 홍차를 접해 보았지만, 아직도 홍차라는 맛의 첫 기억은 그 날의 Lions,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사실 얼그레이라는 생소한 차는 신비로움의 결정체였다. 먼저 베르가못이라는 향기의 이름이 레몬 같은 열매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으니까. 감귤계 열매라고 들어는 왔지만 왠지 유니콘 같이 상상 속의 열매였다. 이미 익숙한 향기와 생소한 노란 열매가 딱히 매칭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얼그레이의 탄생과정은 좀 더 허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해 오는 가장 비싼 홍차는 기문에서 나는 랍상소우총. 이 차는 중국 기문성의 홍차를 가공하는 과정 준에 훈연을 더해 스모크 한 풍미를 가진 차인데, 당시 그 향기의 비밀이 풀리지 않았었다. 영국 상인들은 어떻게든 그 비법을 알고 싶었고, 중국의 용안이라는 과일향을 입혔다는 정보가 돌자 영국 주변에서 가장 비슷한 열매를 찾았단다. 그렇게 수배된 과일이 이탈리아의 베르가못이었고, 그 향을 차에 입혀 19세기 영국 수상이던 그레이 백작에게 올린 차가 얼그레이다.
얼그레이는 이름부터 영국적이다. 백작의 작위로 시작하는 고급스러운 느낌에 코 끝을 스미는 특유의 감귤계 향기까지. 덕분에 호불호도 정확하게 갈리는 차임에는 틀림없다. 향기를 좀 더 진하게 느끼고 싶다면 팔팔 끓는 물을 붓고 오렌지 빛이 날 때까지 5분 정도 우려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이 정석. 이 차의 향기를 좀 더 세밀하게 맛보고 싶다면, 전날 밤 물병에 티백을 넣고 냉장고에 12시간 잠재워 냉침하는 것을 추천한다. 커피처럼 차도 콜드브루로 내리면, 찻잎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맛과 향이 하나씩 깨어나 프리즘을 통과한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탄닌 성분 때문에 차갑게 우리면 뿌옇게 변하는 홍차의 크림다운 걱정이 없는 얼그레이는 유난히 아이스티로 잘 어울린다. 캐나다 사람들은 이 얼그레이로 밀크티를 우리고 위에 우유 거품을 올리고 London fog라는 이름을 지었다. 비 개인 다음날 자욱하게 올라오는 런던의 안개 같은 맛이라고.
연일 폭염을 기록하던 지난여름의 무더운 기운은 아직도 자욱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조금씩 가을바람이 스미기 시작한다. 밖에서 돌아오면 얼음물부터 벌컥벌컥 마셔야 했던 시간들은 조금 지난 걸까. 이제 슬슬 후각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 몸의 감각들이 먼저 예민해진다. 무엇이 달라지는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어떤 바람이 불어오는지 어느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이제는 향기를 맡아가며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걸까. 책이라도 한 권 보자면, 유난히 차 한 잔이 그리워진다. 아직 남은 더위에 뜨거운 차가 부담스럽다면, 과일 향이 가득한 얼그레이 아이스티. 이거면 충분하다.
하귤 얼그레이
Summer Citrus Earl-grey Tea
Ingredients (300ml 1잔 분량)
하귤 얼그레이 시럽 30g
아이스티 컵에 얼음 10개
시원한 물 200~250ml
Method
아이스티 잔에 분량의 하귤 얼그레이 시럽을 넣고 물과 얼음을 넣으면 끝.
잘 섞어 마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