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맛, 빨간 맛.
여섯 살 즈음 시골 할머니 뒷 뜰에는 토마토가 있었다. 늦여름까지 꼿꼿이 자라면 제법 제 키만 하던 토마토는 마치 나무 같아 보였다. 삼촌은 할머니 몰래 가지에서 제일 빨간 토마토를 하나 따서 들려주곤 하셨다. 세상에서 제일 단 토마토라고. 보통은 푸를 때 따서 익히는 과일이지만, 실은 가지에 달린 채 빨갛게 다 익으면 훨씬 더 달다고 했다. 그렇게 두 손 가득히 받아 든 토마토를 한 입 가득히 베어 물었다. 순간 싱싱한 과즙이 눈가로 튀었다.
토마토란 원래 이런 맛이었을까. 설탕을 전혀 뿌리지 않았는데, 뿌린 것처럼 달았다. 코 끝에는 토마토의 싱그러운 향기가 그대로 맴돌고, 달콤한 토마토 물이 입언저리에 온통 얼룩얼룩 묻어 떨어졌다. 누가 또 토마토에 손대냐고 할머니의 역정이 들려오지만, 한 입 가득 깨문 열매의 빨간 맛에 이마에 맺힌 땀마저 바람에 날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매미가 무지하게 울어대던 할머니의 집 뜰에서 먹었던 마지막 여름이었다.
토마토가 과일이 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일본과 한국이 거의 유일한 듯하다. 신기하게도 일본 친구들만은 우리와 동일한 여름 토마토 습관이 있다. 붉게 익은 토마토를 웨지로 썰어 설탕을 뿌려 둔 다음 냉장고에 넣어 두는 것. 학교에서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을 때, 커다란 대접에 한가득 들어 있는 설탕 토마토만 한 것이 또 있을까. 과육은 이가 시리도록 얼음처럼 시원하고 다 먹고 나면 그 그릇에 고인 국물은 세상 무엇보다 달콤했다.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마르고 힘들었던 더위는 설탕 토마토 한 그릇이면 쉬이 사라지곤 했다.
엄마의 설탕 토마토가 기억에서 가물가물할 무렵, 일본 친구 집에서 불쑥 설탕 토마토를 만났다. 우리도 이렇게 먹는다고 했더니, 되려 일본 친구가 놀란다. 참 다르다 싶다가도 한 번씩 이런 교집합을 만나면 일본과 우리 사이가 그리 멀지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토마토의 채소 됨을 가장 먼저 체감한 곳은 중국이다. 1998년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중국에서 보냈다. 매일 아침 현지 대학교 친구들과 아침식사를 먹으러 들르면 우리나라 밥에 해당하는 죽이나 꽃빵에 반찬으로 대여섯 가지의 볶음요리를 만나게 된다. 물론 뷔페처럼 다 주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요리를 골라 얹어먹는 카페테리아 개념이다. 얼추 20여 년 전의 중국 그것도 북경이 아니라 중부지역의 정주에서는 외국인을 위한 요리라는 개념은 거의 없고, 중국의 고기 요리 중에 고수가 없는 요리를 찾는 것도 가뭄에 콩나기다. 이때 가장 안전한 요리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토마토 계란 볶음(西红杮炒鸡蛋)이다.
커다란 중국 웍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툭툭 썰어놓은 토마토를 넣고 한 번 볶아준다. 살짝 익은 토마토 볶음에 계란물을 원 없이 붓고 스크램블하여 뚝딱 접시에 올리면 완성. 버터나 우유를 사용하는 오믈렛보다 담백하고 부드러운 계란에 묘하게 시큼 짭짤하면서도 시원한 토마토의 식감이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중국의 어느 식당에 가도 실패 없는 메뉴인 셈. 밥반찬으로 토마토 볶음을 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98년도의 우리 가족을 단번에 설득시킨 메뉴이기도 했다.
우리가 겨울을 앞두고 김장을 담그듯이 여름철 토마토와 바질이 넘치는 계절에 빠트리면 안 되는 일이 있다.
맛난 이탈리안 혹은 서양식을 먹자면,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생재료들로 1년 치 페스토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재료가 제일 많이 나오는 여름에 한꺼번에 만들어 놓고 얼린 뒤 조금씩 꺼내 먹는 것이 지혜롭다. 토마토 역시 싸게 많이 나오는 여름 철에 마음먹고 말려야 두고두고 먹을 분량을 챙겨둘 수 있다. 물론 한 번 만들어 두기만 하면, 카나페, 샌드위치부터 각종 파스타까지 쉽게 할 수 있으니 이만한 김장이 없다.
사막처럼 건조한 기후로 갈수록 반건조 토마토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건포도처럼 쉽게 파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선드라이 토마토를 맛보기 어려운지라, 공을 들여 오븐에서 구워내야 한다는 사실. 말리는 토마토 역시, 원래는 당도가 높기로 유명한 이태리 품종 캄파리 토마토를 쓰면 좋겠지만, 집에서 먹기엔 방울토마토도 괜찮다. 워낙 약불에 길게 구워야 하니 아예 전날 밤에 넣어 놓고 다음날 일어나서 걷어내면 된다. 수분이 날아가면 그만큼 당도와 향은 진해지고, 특유의 꾸덕한 식감까지 더해져 처음 만나는 토마토 맛을 볼 수 있다. 다만 2kg를 말리면 200g밖에 안 나오는 것이 함정일 수도. 그래도 한 번 말리기 시작하면, 페스토를 만들기도 전에 금세 주워 먹게 되는 것이 더 문제다. 원하는 만큼 올리브 오일이나 허브를 더해 말리면 특유의 향이 두 배가 된다.
반건조 토마토 절임
Oven Dried Tomato
Ingredients (대략 200g 유리병 2개분)
캄파리 토마토 혹은 방울토마토 500g (한 팩)
올리브 오일, 소금, 바질, 오레가노 등 취향의 허브 약간씩 (토마토 위에 흩뿌리는 정도)
병에 채울 올리브유 250ml
Method (숙성 1~일)
1) 오븐 판에 유산지를 깔고 반으로 자른 토마토를 일렬로 놓는다.
(취향에 따라 올리브 오일이나 소금, 건 허브 등을 흩뿌려 말려도 좋다)
2) 80도로 예열된 오븐에 방울토마토는 3~6시간, 캄파리 토마토는 6~8시간 정도 건조한다.
3) 밀폐 유리병이나 용기에 담은 뒤, 공기와 접촉하지 않도록 산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넉넉하게 올리브유로 병을 채워주면 된다.
이탈리아 가정식은 어렵지 않다는 착각을 갖게 된 것은 전부 이 페스토 때문이다. 혹은 처음 맛본 이탈리아 가정식 요리를 십 년 전쯤 영국에서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이탈리아 친구가 만들어 주긴 했지만 재료는 영국 슈퍼의 시판 반제품이 전부였으니까. 페스토 같은 맛의 기본이 되는 양념장을 팔기 때문에 나머지는 신선한 야채나 파스타, 식재료를 얹어 익히기만 해도 스무 살의 테이블로는 환상적이었다. 외국 친구들과 밥을 먹다 보면 이렇게 나라가 다르고, 재료가 다르고, 조리법이 다르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은 거의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토마토의 달콤한 맛에 아몬드의 구수하고 고소한 맛과 치즈를 만나 감칠맛을 더하면, 이탈리아 중부지방 스타일의 드라이 토마토 페스토가 된다. 살아있는 토마토소스들은 새콤 달콤이 진한 청춘의 맛이 녹아든다면, 드라이 토마토는 자체에서 한 번 마르면서 농축되어 더 달고 시큼한 시간의 맛이 담긴다. 사실 바질만 만능 소스가 아니다. 파스타부터 샌드위치, 샐러드 가리지 않고 활용하면, 이탈리아 여름 태양의 맛을 그럭저럭 비슷하게 맛볼 수 있다.
드라이 토마토 페스토
Dried Tomato Pesto
Ingredients (대략 400~500g 1병분)
반건조 토마토 160g(혹은 토마토 페이스트 160g- 파스타 소스가 아닌 되직한 페이스트), 아몬드 50g, 마늘 2쪽, 올리브유 200g, 파마산 치즈 간 것 50g, 생바질 잎 몇 장(취향대로), 소금 약간, 후추 약간
완성된 페스토의 산화방지를 위해 윗면을 덮는 올리브 오일 약간
Method (숙성 1~일)
1) 아몬드는 기름을 두르지 않은 코팅 팬에 살짝 볶아 고소한 맛이 올라오도록 해 준다.
2) 위의 분량의 재료를 모두 넣고 믹서로 잘 갈아준다.
3) 밀폐 유리병이나 용기에 담은 뒤, 공기와 접촉하는 면이 산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넉넉하게 올리브유로 윗면을 덮어주면 된다.
* 냉장고에 넣어두면서 먹는 것은 2~3주. 그 이상은 냉동고에 보관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해동해서 먹어야 한다. 다만, 한 번 해동한 분량은 다시 냉동하지 말고 2~3주 안에 냉장보관하면서 다 먹는 것을 추천.